나라야마 부시코(Le Ballad De Narayama) -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사회 사이에서 보는 도가 사상에 대한 고찰
2019.09.01
오늘 소개할 작품은 1983년 야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감독하여 개봉한 일본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되시겠습니다.
일본어 제목을 해석한다면 <나라 산의 노래> 정도가 되겠군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현재 영화사와 동양 철학에 대한 연구 자료로 자주 거론되는 영화로 유명합니다.
필터링 없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혐오감과 선정성, 그리고 일본에서의 고려장이라는 타이틀로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를 충격에 빠뜨린 작품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죠.
작성자는 영화사에 대해서는 그리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나, 본 영화는 동양 철학 중에서도 노자의 도가 사상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저 역시 철학 전공자로서 처음 도가 사상에 입문했을 때, 본 영화에 관한 과제물을 처음으로 받아 작성했던 적도 있습니다.
도가 사상이라는 것 자체가 노자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무위자연을 주장한다는 특징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당장 노자라는 인물이 실존하는지의 여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문헌과 정보에 따르면,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우주 만물의 형태는 그 근본을 따지면 결국은 17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입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 <노자 도덕경> 속에 있는 '무위 자연'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우주의 근본이며, 진리인 도의 길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무위 자연' 사상입니다. 즉, 법률·도덕·풍속·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죠.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숲 속 같은 '자연' 속에 들어가 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인 그 도(道)를 파악하고 그 안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는 것이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상이 대체 이 영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독자 여러분들은 슬슬 궁금해지겠지요.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하나하나 짚어나가 보도록 합시다.
영화는 19세기 일본 동북부에 위치한 척박한 환경을 가진 오지의 작은 마을을 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서 나는 한정된 식량으로 인해, 이 마을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가혹한 관습을 그대로 따르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관습 세 가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 결혼하여 자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장남에 한한다.
2. 식량을 훔치는 것은 중죄이다.
3. 나이 70을 넘긴 노인은 집을 떠나 나라야마에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입 하나를 줄이기 위해 부모를 버리거나, 자식을 버려야 하는 잔인한 선택의 기로를 부여하는 혹독한 관습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오직 장남뿐이기에,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노동력으로 전락하거나, 그럴 여유도 없을 경우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일은 예삿일이었죠. 거기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은 거름으로 쓰기 위해 아무런 장례도 없이 논에 그대로 버려지는 일도 잦았습니다.
여아가 태어나면 화폐나 소금 등으로 팔아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상품가치가 있는 여아가 태어나는 것을 더 선호하기도 했죠.
그렇듯, 각 가정에서 장남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며,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장남에게 거스를 수 없을 뿐더러, 배우자도 맞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개들을 수간하며 풀기도 합니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주인공 타츠헤이(아들)과 오린(어머니)
영화의 큰 줄거리 틀은, 주인공인 타츠헤이와 그의 어머니 오린,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중점으로 서술됩니다.
69살이 되어 나라야마에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어머니 오린, 희귀한 피부병에 걸려 악취로 고생하고 있는 동생 리스케,
곧 결혼을 하는 타츠헤이의 장남 케사키치, 그리고 케사키치의 아내가 될 무능한 며느리인 마츠야 등 여러 복잡한 이야기가 겹쳐지며 진행됩니다.
곧 나라야마에 가야 함을 깨달은 오린은 자신이 아직 정정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 늙어서 집을 떠나야 함을 어필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 이빨을 돌절구에 부딪쳐 깨뜨려 버립니다.
그 와중에 마츠야네 집안은 늘어나는 가족 구성원 때문에 식량을 훔치다 발각되었고, 사위인 케사키치마저 범인인 장인의 따귀를 때리며 잘못을 추궁합니다.
그만큼 먹을 것을 훔치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를 보여주죠.
중죄의 대가는 생매장. 일가족 전부가 생매장을 당합니다.
심지어 케사키치의 아이를 임신한 마츠야마저.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오린이 나라야마로 갈 때가 되자 동네 어른들이 모여 젊은이들에게 그 과정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알려주기 시작합니다.
-산에 버려지는 노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아무도 모르게 나가야 하며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
-노인을 지고 나간 자는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그 규율을 기억한 채 주인공 타츠헤이는 어머니 오린을 지게에 지고 길을 떠납니다.
나라야마에 도착하자 그들을 반기는 것은 혹한의 시작을 알리는 폭설이었습니다.
타츠헤이 : 어머니, 눈이 오는군요.
오린 : 그래, 내가 운이 좋아서 눈이 오는 거란다.
그 눈이 버려진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 세대를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혹독한 선택.
지금까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던 타츠헤이였기 때문에, 그 선택이 쉽지 않았음이 드러납니다.
어머니를 버려둔 채 집에 돌아온 타츠헤이는 의연하게 생활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린이 남겨 둔 옷을 나누어 입는 가족들, 아내를 잃고 새 배우자를 찾은 케사키치 등....
산 사람은 살아가고, 죽은 사람은 흔적없이 사라지는 덧없는 마을과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잔인하면서도 다른 문화권에 내어놓기에는 어려운 요소들을 아주 적나라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큰 이슈가 된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나라야마라는 산 속에 고립되어 살아가고 거기에서 형성된 사회관과 그곳의 도덕, 그리고 우리의 현재 사회관을 관객으로 하여금 병치시켜 볼 수 있게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관습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끔 하는 영화, 그 안에서 우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올바른 것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과연 우리를 얽매고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나라야마 부시코'의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 이야기를 나와 가족을 통해, 그리고 나아가 가족과 집단을 통해, 그리고 인간과 동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순환되는 고리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뱀은 쥐를 잡아먹고 동면에 채 못 들어가 죽은 뱀을 쥐가 다시 먹고 죽을 때가 된 할머니는 며느리의 뱃속의 아이가 왠지 자신 같다고 이야기하고, 이처럼 인생사가 자연과 마찬가지로 순환되며 순간의 집착이 부질없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마을은 마치 `원시 공동체' 사회를 보는 듯 합니다. `생계 유지'는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간과 동물의 성관계장면(獸姦) - 강간처럼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것이며, 이 본능을 바탕으로 그것은 마을을 유지하는 `관습' 그리고 `법'으로 적용됩니다.
생존 앞에서 생명은 먹을 입 하나가 더 늘어난 성가신 일이요, 탄생의 신비나 경이로움 같은 우리가 흔히 접하던 생명의 개념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죽음이 도리어 대수롭지 않고 익숙한 것으로 전락하죠.
마치 마츠야를 잃고 오열하던 케사키치가 금세 새 아내를 맞은 것처럼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과 그 기준이 대체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이상적인 것인지 거듭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