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도의 일상

현대프랑스철학 : 레비나스

코우(Coe) 2022. 10. 15. 11:55

 

1. 여는글 : 존재론의 모순과 이에 반한 자

고금을 막론하고 프랑스 철학에 처음 입문했을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철학자와 어구를 꼽으라면, 역시 데카르트와 그의 말로도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 보던 데카르트가 끝내 의심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서양 철학을 공부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식 주체 중심의 존재론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 중심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나의 세계"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조차도 "나의 세계"로 끌어들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본 글에서 다루게 될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E.Levinas/1906~1995) 되시겠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1906~1995)

2. 레비나스 / 생애와 사상

리투아니아의 코우노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유대인 예힐 레비나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던 그는 6세부터 집에서 히브리어 개인 교습을 받고, 성경과 탈무드를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외에도 리투아니아의 모국어였던 러시아어를 접하면서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슈킨 등의 작품들도 읽게 된다. 이들은 그의 사상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레비나스의 일가족은 우크라이나로 피신해야 했으며, 레비나스는 그로 인해 "어린 시절이 매우 짧았다."고 말한다.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말살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부모와 두 형제를 잃은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하고 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1923년, 레비나스는 프랑스의 쉬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28-29년에는 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의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그의 철학자로거의 활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다. 그의 철학적 경향은 전쟁동안 그가 겪은 경험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 학살과정에서 희생된다. 레비나스 자신은 프랑스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전쟁포로로 독일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며, 그의 부인과 딸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지냈다.

1930년,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오스트리아의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내세운 '나와 너'의 관계에 크나큰 관심을 가졌다. 레비나스가 주로 다루는 타자에 관한 문제를 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계기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34년, 레비나스는 <히틀러주의 철학에 대한 몇 가지 반성>을 내면서, 전면 전쟁을 감행하고자 하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위험을 만천하에 드러내려 한다. 폭력과 인종주의의 뿌리를 노출시키고 '다르게 사유함.' 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해보려는 치열한 노력도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이후 1963년 푸아티에 대학 철학 교수로 임명된 레비나스는 철학사를 가르치다 1967년 파리의 낭테르 대학을 거쳐, 1973년 소르본 대학의 철학 교수로 활동하다 1976년 정년퇴임한다.

이후 여생을 보내던 그는 결국 1995년 1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3. 타자성의 철학

서양철학은 존재자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존재자의 본질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인식론의 역사였으며, 그 중심에는 인간의 주체적 자아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자아중심적인 존재론과 인식론을 거부하고 윤리학이 그보다 더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생각하는 나」대신「윤리적인 나」가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윤리적인「나」는 누구인가? 윤리적인 나는 타자와 대면하여 자아중심적인「나」의 자발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나」이다. 윤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도덕성이 아니며,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해 주는 단순한 지침도 아니다. 윤리란 바로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자아중심적인 자발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자아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찾아 나서는데서 윤리는 시작된다는 것이다.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타인의 타자성에 근거한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이 열린다. 자아의 자기동일성 보다는 타인이 더 우선적이라는 데에 윤리적 의식의 본질이 있다.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타인은 우선적으로 자아에 대하여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외재성이다.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로 통합시킬 수 없는 절대적으로 다름, 즉 절대적인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 타인은 유한한 자아의 사유대상이 아니며, "떼어내어진, 절단된"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절대적 타자성」은 "자아에 종속되지 않고 자아로부터 절단된 타자성"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행동은 폭력이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강령이 분명해졌다.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대로 있게 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강령은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인정해 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정의는 사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정의에 기초한다: "amo volo ut sis"(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인 그가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랑이 타인을 절대적인 타인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라면 타인의 절대적 타자성은 어떻게 보증되는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타자를 만나야 하는가? 우리가 만나는 타자의 종류에 따라 그에 대한 위리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타자는 크게 사물로서의 타자와 타인으로 타자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세분된다. 우리는 사물로서의 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사물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어떤 목적을 위해 기여하는 도구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물에 대해 잘못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태도가 인간관계에까지 확장된다면 모든 관계의 파멸이다. 사물은 도구가 아니다. 사물에는 세계가 있다. 세계는 사방이다. 사방은 동, 서, 남, 북의 방위만이 아니다. 사물에는 하늘과 땅이 들어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있다. 하늘과 땅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며 하나님의 은총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의 존재의 보증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물로서 강물에는 그 물을 지탱해 주는 땅이 있으며, 그 물이 기원된 하늘이 있으며, 그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는 죽을 자들이 있으며, 죽을 자들을 위해 그 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있다. 우리의 세계는 하늘과 땅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는 사물 속에서 사방으로서의 이런 세계를 발견하며, 또 발견해야 한다. 사방으로서의 이 세계는 한 사물을 사물이게 해주는 사물의 사물성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물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 사물의 사물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사물에서 세계를 발견해야 하며 그 세계를 보호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세계의 거주자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보존하면서 사물과 함께 세계에 거주하는 자이다. 우리는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함께 거주하는 자이어야 한다. 어떻게 거주함이 마땅한가?

 

1. 인간은 그가 땅을 구원하는 한 거주한다. 그는 땅을 개발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작함으로써 거주해야 한다.

2. 인간은 하늘을 하늘로서 수용하는 한 거주한다.

3. 인간은 신적인 것을 신적인 것으로서 기다리는 한 거주한다.

4. 인간은 그의 고유한 본질 즉 죽음을 죽을 수 있는 본질에 순응하여 잘 죽을 수 있는 한 거주한다.

 

모든 문화와 문명은 이러한 거주함의 방식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 한에서 문명은 파괴가 아니고 건설이 될 것이다. 인간은 사물을 건설하면서 사물과 함께 세계에 거주해야 한다. 건설할 때는 사물 속에 들어있는 세계 즉 사방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의 탐욕스런 개발정책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그 결과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사물 속에 들어있는 세계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거기에 사유하는 인간의 본질이 있다. 인간의 사유능력은 바로 사물 속에서 세계를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인간은 사물로서의 타자를 대할 때 사물의 사물성을 고려해야 한다. 즉 사물 속에서 사방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타인은 도구도 아니며 사물도 아니다. 타인은 이 사물의 세계에 함께 거주하는 자이다. 우리는 타인을 함께 거주하는 자로 대해야 한다. 땅에 함께 거주하면서 하늘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자로 대해야 한다. 그런데 거주자들 사이에는「사이」가 있다. 이「사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얼굴」이다. 사람(人)은 사이(間)에 있으며 그 사이에는 얼굴이 있다는 것이다. 얼굴을 매개로 우리는 서로 만나며 또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통해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편에서는 타인이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는 뜻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얼굴을 가지고 타인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먼저 타인은 나에게 얼굴을 통해 다가온다. 내가 타인의 얼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듯이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타인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어떤 것인가?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의로 피할 수 없는 낯선 침입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단지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이러한 관계는 나의 주관적 지배성이 배제된 「관계성 없는 관계」이다. 즉 자아와 타자는 서로 상호침투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자아는 단지 타자를 지각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타자를 수용할 때 타자는 더 이상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내면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접촉점이 된다.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살기를 주장하기 이전에 먼저 타인의 절대타자성이 긍정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타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상생) 존재자로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 '(Ethics precedes ontology)' 라고 레비나스가 일컫는 "타자성의 철학." 이다.

 

 


4. 닫는글

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한 부모와 두 동생의 학살, 국사사회주의의 냉혹함, 스탈린주의와 테러리즘, 지역 간의 분쟁 등, 20세기를 점철했던 이 참혹한 현실들은 레비나스로 하여금 서양철학을 근본에서 톺아보게 했다. 레비나스의 결론은 서양철학과 전쟁이 깊이 결탁해 있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존재, 정신, 이성, 역사 따위를 중심축으로 하여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이런 시도는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동일성의 철학, 타자를 전체나 체계 속에서 파악하는 전체성의 철학으로 귀착하였다. 그런 한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질서를 통해 인간을 강제하며 인간의 인격성을 중단시키고, 전체의 미래를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전쟁은 서양철학의 전체론적 특성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이 전체주의로 발전하는 것을 레비나스는 두려워했다. 이미 나치즘이라는 사례로 이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서양의 근대는 이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근대적 주체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사회를 포함한 세계 전체를 이해한다. 이 근대적 주체에게 소위 근대적 이성은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봉사하였고, 세계는 계산 가능하고,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인간의 이해(理解)와 이해(利害)는 인간 간의 갈등으로 힘의 논리로 이어졌고 곧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으로 극화되었다.

레비나스의 사상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란, 폭력과 전쟁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전체론을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해 있는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타자’와‘ 윤리’다. 타자와 윤리라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뭐 타자와 윤리적 관계를 맺으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일까?

놀랍게도 레비나스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현재 우리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타자는 존중된다. 그 이유는 그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타자도 인격을, 인간의 존엄성, 자유, 권리 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에서 타자가 존중되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이 상실되는 한 즉 타자가 진정한 타자로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타자와 내가 또 무수한 타자들이‘ 동일한 독립적인 개인’으로 간주되는 한에서다. 타자의 다름과 독특성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자는 주장 또한, 나는 존중받아야 하고 나의 불가침의 영역은 안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배면이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권은 타인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면 타당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나의 자리가 나의 자리일 수 없다는 이 극단적인 윤리적 의식은 신자유주의와 경쟁 이데올로기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무시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제공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우리 모두가 성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레비나스는 단지 인간의 성스러움을 이야기할 뿐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근본적 됨됨이가 자기이해를 고수하고 확장하려는 코나투스적 존재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자기 삶에 대한 집착은 넘어서야 할 대상이다. 타자에 응답하는 책임지는 삶. 나의 것을 내어 타자를 환대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예로 든 과부, 고아, 이방인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존재한다. 우리 시대의 타자는 경제적 약자, 성적 소수자, 난민, 이주 노동자, 노숙자, 여성일 수도 있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자들, 혹은 직장을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내몰린 해고 노동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와 대면하는 그 모두가 타자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타자는 무한하고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경쟁이 판치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현대의 신 자유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이 얼마나 달콤하고 또 내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 강영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