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철학 : 동학

철학도의 일상 2022. 10. 15. 11:53

 

 

원제 : 인간의 ‘행복’을 위한 ‘종교’
아수라장 속에서 떠오르며 빛났던 ‘동학’

작성일자 : 03.23.2017

 

1.여는글 : 혼돈과 종교

인간은 굶주린 상태에서 배부른 상태를 원해 왔으며, 비바람을 뒤집어쓰며 추위에 떠는 상태에서 견고한 지붕과 벽이 있는 집과 의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행복이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 정신적인 면에도 일정부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만족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정신적인 면을 추구하여 왔다. 한 가지 예로 죽음은 예측할 수 없는 불가피한 손실이나, 종교를 통해 사후(死後)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일정부분 해소하였다. 또한, 정토나 천국, 극락 등, 일종의 구원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으로써, 죽음을 여느 ‘손실’에서부터 앞날에의 ‘희망’으로 승화시켰다.

 

 

 

 

 

 

 

 

 


이를 토대로 파생된 수많은 종교에서는, 그 이념의 바탕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자’ 라고 하는 철학적 사상이 담겨 있어, 그 방법론은 종교나 종파에 따라 다양함으로 보이고 있으나, 종교에 참여하는 주체가 인간인 이상, 사회와는 동떨어져 지낼 수는 없다는 관점이 있어, 개개인의 사람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계율과 같은 형태로 방법을 제시하거나, 또는 설화 등을 이용해서 납득시키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에 따라, 사원, 교회 등 종교시설의 관계자는, 일종의 상담인(카운슬러)로서의 사회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며, 근대의 생활 속에서 삶의 고비마다 작용하는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다. 또한 지역 주민의 불안이나 고민을 해소하고, 또한 지역사회의 일체감을 향상시키는 시설이기도 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러한 종교시설의 기능이 잘 작동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종교관의 쇠퇴 때문에, 또한 신흥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으로 말미암아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요구되지 않는 예도 있다.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 문제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자살을 하는 일도 있어 상황은 단순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 치료사들과 심리학자들은 심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 그 종류에 상관없이 종교를 가질 것을 권장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역시 심신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통계 역시 존재한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각박해지는 사회 속에서 일명 “군중 속의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현실의 삶 속 어려움으로부터 위안을 얻으려는 것은 물론이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생활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사람들 역시 “자아실현” 이라는 현실 너머의 또 다른 가치와 만족감을 위해 신앙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는 현대뿐만 아니라, 아수라장 같았던 18세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2. 수운 최제우와 동학의 탄생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유명한 ‘평안도 농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농민봉기와는 달리, 당시 정권을 비판하고 농민의 의식을 통일하는 데 일조했으며,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동학교도들이 있었다.

 

 

초대 교주 최제우

 

이와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경주 출신의 몰락한 양반의 자제였던 최제선은 조선 사회의 가부장적인 법률로 인하여 출세할 수가 없었고, 이는 그에게 크나큰 의구심을 품게 해주었다. 각지를 떠돌며 상업과 수련에 열중하던 그는 결국 양성이 불평등한 사회의 불합리성과, 기존의 어떠한 사상으로도 나라의 부패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세상을 구제할 새로운 방도를 찾기 위해 방랑하기 시작한다.
방랑하던 도중 최제우는 한 승려에게서 ‘을묘천서(乙卯天書)’ 라는 서적을 받게 되었으나, 그 서적의 내용은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에 영향을 받은 그는 구미산의 용담정에서 거처하면서 이름을 제선에서 제우로 고친 후 수운(水雲)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860년 음력 4월 5일, 그는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 또한 고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출생케 하여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라는 일종의 게시를 한울님에게서 받게 된다.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끝없는 커다란 도’라는 뜻의 ‘무극대도(無極大道)’ 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1년 후 이 ‘무극대도’ 는 모든 이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을 가진 ‘시천주(侍天主)’ 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1년 1월 이 ‘시천주’를 내세우며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 김대건 신부에 의해 유입된 천주교를, 사람들이 ‘서학(西學)’ 이라 부르기 시작하자, 자신의 사상을 이와 구분하기 위해 ‘동학(東學)’이라 이름 짓는다.
그러나 동학은 천주교와 함께 신분제를 무시하고 제사를 거부하는 등 유교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조정은 천주교와 함께 동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최제우 역시 이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서술하였으며, 조정에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 자신의 제자였던 최경상을 후계자로 지목하는데, 그가 바로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이다. 최시형이 날품팔이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대 교주였던 최제우와 동학이 신분차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기존에 배워온 모든 학문이 동학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철저하게 신앙심과 능력만으로 인재를 뽑는다는 점을 실감할 수가 있다.

 

 

2대 교주 최시형

 

최시형은 최제우의 깨달음에 대해서 지은 <동경대전> 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간행하여 동학사상을 체계화했으며, 그의 사상이었던 ‘시천주’를 발전시켜, “사람은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겨라.” 라는 뜻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조정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동학을 비정치적 종교활동에 국한시키려고 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894년, 동학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 ‘동학농민운동’ 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탄압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 운동(伸寃運動)으로 시작되었지만, 운동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되었고 또한 민란과 결합되어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기치로 내걸은 농민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역할이 농민의 요구를 횡적으로 연결시킨 조직적 매개체 또는 단순한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농민 운동의 지도 원리로서의 동학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며 동학 자체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의 구제를 철저히 하려는 정치적 운동의 성격을 아울러 지닌다고 보기도 한다.
결국 동학군은 끝내 조선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으며, 2대 교주인 최시형 역시 1898년 처형되고 만다.

 

 

3대 교주 손병희

 

최시형은 1897년, 의암(義菴) 손병희를 후계자로 정하여 그 뜻을 이어 나가도록 했는데, 일본의 개화문물을 받아들인 손병희는 이를 활용해 국권의 회복에 힘쓰기로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동학에는 친일세력이 등장하는 부작용이 일어났으며, 손병희는 1905년 친일 세력을 배제한 정통 동학파인 ‘천도교’를 창설하게 된다. 그는 최제우, 최시형의 ‘시천주’, ‘사인여천’을 계승하여 “사람이 곧 한울이다.” 라는 뜻의 ‘인내천(人乃天)’ 으로 발전시켰으며, 이외에도 “나라를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동학을 천하에 퍼뜨린다.” 라는 뜻의 ‘포덕천하(布德天下)’, “널리 사람들을 구제한다.” 라는 뜻의 ‘광제창생(廣濟蒼生)’ 등 현실 개혁적인 구호를 제창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는 현실을 목도한 그는, 동학교도들에게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1919년 3.1 운동에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등 사회 주체로서의 민중을 만들어내고 참여하게 하는 데 공헌했다. 조선왕조 500년과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을 지배해온 이념이었던 유교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자, 동학이 등장하며 이를 넘어선 것은, 노동하는 민중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동학 사상

i) 시천주, 사인여천, 인내천

먼저 수운이 창설한 ‘시천주’에 대하여 알아보자. 시천주란 ‘한울님을 내 몸에 모셨음’을 의미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이 된다. 최제우는 한울을 한자로 표기할 때 천주(天主)라고 표기했었기 때문에 천주교도로 오해를 받았지만, 동학의 한울님과, 천주교의 하느님은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동학의 핵심 개념인 시천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울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시천주’란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과 일체가 되기 위해 자기의 인격수련과 올바른 삶의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최제우의 ‘시천주’에서 한울님 관념은 고대농경사회의 ‘한울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천(天)은 토질 및 인력과 더불어 핵심적인 중요성을 띠는 요소로서, 천신·지신·조상신 숭배사상을 낳게 되고, 점차 보다 큰 부족국가사회로 발전됨에 따라 천신위주의 ‘한울사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울이라는 용어는 한알·한얼·한·하늘·하느님 등으로 변형되어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최제우의 ‘한울’은 이러한 전통적 천사상(天思想)을 새로운 맥락 속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님’에 대해서는 최제우가 천주의 주(主)를 언급하고 있는 <논학문 論學文>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주(主)는 그 높은 덕을 찬양하여 부모와 같이 섬기는 것이다(主者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천주라는 말은 하늘에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님’의 의미를 붙인 것으로 ‘한울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학의 한울님은 서학의 천주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천주교의 천주는 라틴어의 데우스(Deus)를 옮긴 것이나, 동학의 천주는 우리 겨레의 전통적인 한울님신앙을 한자말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학에서 천주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서학에서는 천주가 신(神)을 뜻하므로 여기에 존경의 의미로서 ‘님’을 다시 붙여 말하는 것이다. 최제우도 동학과 서학은 “도(道)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道則同也 理則非也).”라고 하였으나, ‘천주’라는 용어상에서 같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동학과 서학이 다름없다고 보고 탄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대 교주였던 해월은 시천주에 담긴 평등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겨라” 라는 뜻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이라 한다. 인간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면 당연히 그를 모시는 인간 역시 고귀한 존재라는 이유에서이다. 더 나아가 그는 여성이나 어린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 역시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 역시 존귀한 존재로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외에도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 한울이 깃들어 있으며 인간이 다른 인간이나, 동물, 사물을 대하는 방법이 곧 한울을 대하는 방법이라 주장하였다.
해월의 ‘사인여천’은 3대 교주인 의암에 의해 ‘인내천’으로 이어진다. 모든 이가 한울을 섬기고 있으며, 모든 사람을 한울을 대하듯 대해야 한다면,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남들을 한울처럼 대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한울임을 깨닫고 이에 가까워지는 것. 한울님다워지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인내천’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당시 조선의 신분 차별 의식과는 양립할 수 없었으며, 모든 이가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모시고 있기에 인간사회의 법도를 통해 차별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이로서 상민과 천민이 정치적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ii) 수심정기
수심정기(守心正氣) 는 수운이 내세운 동학의 수행 방법이다. 해석하자면,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로잡는” 것이다. 해월은 이를 “마음의 근원을 맑게 하고, 그 기운의 바다를 깨끗하게 한다.” 라고 말한다.
타 동양철학과 마찬가지로, 동학에서도 마음과 기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음이 평안하면 기운도 평안하고,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기운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몸을 이루는 기운을 바로잡으면서도, 기운으로부터 나오는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는 의외로 간단하다. 만물에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면, 일상의 모든 것, 심지어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는 것까지도 한울님을 접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모든 것을 경건히 해야 하며, 특히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할 경우, 식음만 경건히 해도 우주의 근원적인 존재를 모실 수 있음을 강조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의 용이성을 가진 수행을 동학은 중요시 여겼다.

iii) 개벽
동학의 사상을 이해하고, 수행을 거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이다. 즉, 개개인이 군자가 되는 것이다. 동학에서는 한울님을 모신 모든 이가 군자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필요가 없는 유교적인 사고와는 다른 방식이다. 모든 이가 군자가 된다는 것은, 모두 인격의 완성체가 되는 것이요, 모두가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은 이를 “다시 개벽”이라 고 명명했는데, 태초에 세상이 열린 것이 “개벽”이라면, 현재는 모든 이가 군자가 되지 못하는 시대요, 모든 이가 군자가 되는 시대가 마치 세상이 열리듯,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이를 토대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기존 신분질서를 유지한 채 최상위 지배층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신분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혁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닫는글 : 동학의 한계와 의의
동학은 신분을 막론하고 사회, 정치적인 주체로서의 개개인을 만들 수 있게 하였으며, 지금까지 단순히 세상에 대한 분노만을 표출하던 민중의 봉기가, 그 분노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의를 보여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그 주체가 될 수 있음 역시 강조했다. 그들의 말 그대로 ‘보국안민’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각성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동학의 기본적인 이념이었던 ‘시천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주의 근원을 모시는 인간이야말로 사회운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유교의 질서가 붕괴된 조선후기 사회에서 일반 백성들의 의식 속에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면, 동학은 그 갈망을 실체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학은 이와 동시에 하나의 종교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는 기복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해서 신앙 생활에 대한 보상심리가, 즉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보상과, 그리고 이에 대한 기대가 작용하는 경향도 농후하다. 참된 종교적 활동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게 하며,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지지받고 명예로운 삶, 혹은 배려와 희생을 통한 가치의 실현에서 비롯되는 희열을 얻음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행복감을 성취하게 해주는 것이다. 비록 자유와 행복이 그 동기였다 할지라도, 그 소명에 대한 사명감이나 진정한 수양의 계기가 발현되지 않는다면, 지속적으로 만족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동학과 동학농민운동이 단순히 상류층의 탄압과 이에 대한 보상을 목적으로 탄생했다면, 그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행복 역시 변질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반에 물건을 올려놓기 전에 선반의 먼지를 모두 떨어내야 하듯, 신앙생활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기 이전에 진정한 행복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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