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마인드/440번 환자 - 일류 피아니스트의 트라우마를 통해 보는 강박증세에 관한 고찰

2022.10.18

이번편 역시 지난번에 이어서 <네버마인드>의 다음 스테이지를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루게 될 환자는 튜토리얼을 포함한 전편의 세 스테이지를 모두 클리어할 경우 조우할 수 있는 440번 환자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게임에 대한 소개와 정보는 전편 글을 참조하시길 바라며, 바로 리뷰를 시작해보도록 하죠.

전편보기

251번 환자

https://cafe.naver.com/philosophyandtalk/1966

 
 

의뢰인은 유명인사로서 최근 직업과 관련된 사건으로 인해 과도하며 해로운 죄책감을 보입니다. 의뢰인을 Neurostalgia Institute에 소개한 친구나 동료들은 의뢰인이 의뢰인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심오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우려를 표현했습니다.

이번 인게임 배경에서 피아노가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이는 걸로 봐선, 이번 의뢰인은 음악과 관련된 유명인사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피아노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검사 이전 환자의 진술

걱정은 고마워요. 애써주신 것도요. 그런데 과장이 좀 심하네요.

우리 솔직해지죠. 난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요. 실수하는 게 당연해요.

공연 때 있었던 일은...어딘지 몰랐어요, 끔찍했어요!

네, 창피해요. 수치스럽기까지 해요!

하지만... 이젠 그게 내 현실이겠죠.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날들은 이제 지나갔죠 - 거기에 있었던 일은 그저... 새로운 일상이죠.

그런 실수를 잊는 건...

어릴 때부터 내 좌우명은 항상 이거였죠.

"고통이 날 훌륭하게 만들고, 완벽함은 고통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래요, 죄책감이 들어요. 누군들 안 들겠어요? 특히 "나"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죠.

그런데 그게 지나치다고요?

변덕스럽다고요?

강박적이라고요?!

이봐요, 내 친구들과 동료들 - 다들 "나쁜 뜻" 아니란 거 알아요, 다만... 이해를 못 할 뿐이에요.

이해한 적이 없죠.

난 "평생" 완벽을 추구했어요. 일단 진정한 완벽을 맛본 사람은 - 결코 잊지 못하죠.

그 공연...

난 관객을 실망시켰어요.

오케스트라도 실망시켰어요.

나한테도 실망했죠.

난 끔찍한 실수를 저질러 날 믿는 모두를 실망시켰어요.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그런데도 당신이나 나나, 당신네 그 빌어먹을 잘난 기술이나 시술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요!

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늘 그래 왔으니까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 이게 트라우마와 관련 있다니 과장이 아주 심하네요.

저 때문에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인제 와서 그런 게 다 왜 중요하죠?

아무래도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일생 동안 내내 이런 강박증세에 시달려왔으며, 알츠하이머로 인해 이게 더 악화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피아노가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방이 보입니다.

그리고 의뢰인의 단서를 모을 수 있는 판과 물망초가 핀 뇌 형태의 모형을 볼 수 있죠.

물망초의 꽃말은 "진실된 사랑." 그리고 "나를 잊지 마세요."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의뢰인이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와 무언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방에서 나가 주변 사물들을 살펴보자, 유명한 피아니스트임을 보여주는 포스터들이 보입니다.

의뢰인은 일류 음악인이었던 모양입니다.

통로를 빠져나오자 오케스트라 무대가 보이는군요

의뢰인의 기억을 조사하기 위해 피아노에 앉아 보겠습니다.

지문이 찍힌 건반에서 연주를 할 수가 있군요. 하지만 악보가 없어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연주를 해보자, 메트로놈이 가득한 필드로 이동해버렸습니다.

의뢰인이 일류 피아니스트였던 만큼 음악과 박자에 의한 강박관념이 의뢰인의 마음을 제대로 잠식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메트로놈의 추가 좌우로 움직이며 지면을 강타하는데, 이 범위 안에 플레이어가 서 있으면 데미지를 받고 필드의 시작지점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당황하지 말고 메트로놈을 요리조리 피해 필드 내의 단서를 찾아 봅시다.

단서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자, 청록색의 메트로놈이 보입니다.

안에 통로가 있군요.

다시 게임을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오자 뇌 위에 핀 물망초가 시들었습니다.

알츠하이머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걸까요?

다시 방 안의 통로를 따라가보자, 방 불빛이 어지럽게 깜빡이면서 부정적인 문구들이 적힌 액자가 보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거나, 더 슬프게 울어라."

"너의 실수는 모두의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모두가 실패를 싫어해."

통로를 빠져나오자 설명서와 함께 악기 형태의 퍼즐을 볼 수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강박관념을 심어주는 설명서와 함께 악기의 연주법을 구사하여 푸는 퍼즐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강박적인 가르침과 함께 의뢰인의 감정변화를 보여주는 듯한 드럼 형태의 퍼즐 설명서

희생이라고 쓰여진 부분은, 손가락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손을 다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강박적인 연습을 강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서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퍼즐을 풀자...

마지막 퍼즐을 풀고 나가자 이번에는 의뢰인을 비난하는 포스터나 신문기사들이 보입니다.

알츠하이머로 인해 공연장에서 실수까지 하게 된 모양입니다.

다시 오케스트라 무대로 돌아오자 이전의 퍼즐과 유사한 피아노 형태의 퍼즐이 보이는군요.

그런데, 건반을 하나하나 누르자 설명서가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합니다.

필연적으로 실수를 할 수밖에 없겠군요.

피아노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다시 어디론가 이동하게 됩니다.

통로를 따라 들어선 곳은 의뢰인의 집으로 추정되는 공간과, 퍼즐에서 본 그 피아노였습니다.

다시 피아노를 조사하기 위해 피아노 뚜껑을 열자...

방이 피로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강박적인 연습으로 인해 생긴 손의 상처는 피가 날 정도로 심각했던 걸로 보입니다.

방이 피로 차오르면서 이동한 공간은 손가락 끝에서 피를 흘리는 청록색 손과 피아노 건반으로 이루어진 공간.

주변을 둘러볼때마다 피아노 건반으로 된 바리케이드가 길을 막고 있으며, 손가락이 부러져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떨어지는 손가락을 요리조리 잘 피해가면서 필드 주변의 단서를 수색해 보겠습니다.

단서를 모으자 막힌 길이 뚫리며 점차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됩니다.

손에서 쏟아지는 피는 어느새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단서를 찾아내자,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친 손과, 피아노 건반, 그리고 필드 내에서 끊임없이 흩날리는 물망초 꽃잎,

강박증으로 인해 손까지 희생을 했지만, 알츠하이머로 인해 더 악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출구를 발견했으니 다른 곳에서 더 조사해보겠습니다.

다시 시작지점으로 돌아오자, 중앙에 있던 뇌 모형에 있는 물망초가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그 색이 없어졌군요.

의뢰인의 트라우마가 플레이어의 치료로 인해 완화되는 것인지, 아니면 알츠하이머로 인해 잊혀지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시 통로를 따라가자, 알츠하이머가 의뢰인에게 끼친 영향을 보여주는 듯한 포스터도 보이는군요.

다시 도착한 무대, 이번에는 분위기가 좀 으스스하군요.

또 피아노 퍼즐을 풀어야 하는 것 같은데...

다행히 이번에는 피가 맺힌 악보와 지문이 어느 건반을 쳐야 할 지 알려줍니다.

지문을 따라 피아노 건반을 누르자 무사히 오케스트라가 종료됩니다.

방금 전까지 으스스했던 분위기가 점프스케어 대신 이런 연출을 위한 거였다니 정말 다행스런 일입니다.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으니 무대에서 퇴장.

구태여 음악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인은 그 성과에 관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죠...

"예술은 가볍고 즐거워야 한다""예술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늘 화제가 되어 대립하는 예술이 추구해야 할 두 가지의 길이 있지만, 어느 길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마지막 단서까지 모두 찾아낸 후 시작지점으로 되돌아왔으니, 이제 이 단서들을 언제나처럼 배열해 봅시다.

이번도 다섯 개는 진실, 나머지 다섯 개는 거짓.

-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기억을 잃은 걸 상기했죠. (FALSE)

- 부모님께서는 유명한 피아노 강사를 고용하셨어요, 최고가 아니면 안 되니까요. (TRUE)

- 그는 제게 늘 실패를 두려워하라고 가르쳤어요. (TRUE)

- 모두가 완벽하진 않다는 걸 깜빡했어요. (TRUE)

- 다른 아이들처럼 저 역시 모든 것에 딱히 "재능" 이 있지는 않았어요. (FALSE)

- 한 번은 고통스러운 실수를 한 적이 있어요, 제 손이 대가를 치렀죠. (TRUE)

-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한 결과, 저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됐어요. (TRUE)

- 부모님께선 관심도 없어 보였어요. (FALSE)

- 다른 아이들이 제 손을 보며 놀렸어요 (FALSE)

- 그는 저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어요. (TRUE)

다시 밝혀지는 진실

예상했던 대로 의뢰인은 일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피아노를 배워 왔고 부모님의 소개로 유명한 피아노 강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피아노 강사는 지나친 완벽주의자였으며, 의뢰인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컸다는 점이 문제였죠.

그리고 의뢰인이 어릴 적 피아노 연습을 하던 도중 실수를 하자, 강사는 의뢰인을 계속 닦달하다 결국에는 그대로 피아노 건반 뚜껑을 내리쳐 닫아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의뢰인은 실패에 대한 공포로 인해 피아노에 대한 트라우마가 발생했고, 훗날 "황금의 손"이라고 불릴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일류 피아니스트가 되었지만, 이게 모두 그 트라우마로 인한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였으며, 그녀의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던 거였죠.

그리고 이게 극에 달하자, 결국에는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실수를 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던 겁니다.

게다가 의뢰인이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는 이에 아무런 연관도 없었으며, 의뢰인의 어릴 적 트라우마는 되려 알츠하이머로 인해 점차 기억나지 않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죠.

뉴로스탤지어와 플레이어의 활약으로, 트라우마의 진정한 원인을 찾아낸 의뢰인은 알츠하이머도 때때로는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플레이어의 정신 탐험을 통해 자신의 잊혀진 기억을 찾아내 주어서 감사하다며,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게임 속의 이야기가 끝났으니 다시 현실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 정도면 됐어 VS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어

이 두 가지의 선택지 중 어느 쪽 성향이 더 강하신가요?

후자의 성향이 더 강한 사람들은 과거의 성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고, 크고 작은 성취에 기뻐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더 몰아붙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죠.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최고를 추구하게 되고, 조그만 성취에도 무감각해지며, 만족할 줄 모르게 됩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최고가 되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든 남을 이기려는 욕구 역시 발생하죠.

이런 생각과 태도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팀원들의 작은 성취를 무시하고 계속 팀원을 갈구는 팀장으로 이루어진 팀이

과연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위플래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 뉴욕의 셰이퍼 음대에 입학한 주인공 앤드류는

최고의 지휘자이지만 동시에 최악의 폭군인 플레처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플레처는 누구든 성공으로 인도하지만, 그 과정에서 폭언과 폭력을 마다않으며 사람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교육방식을 고수하고 있었죠.

오죽하면 어록 중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고 가치없는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good job)'야"

라는 말이 영화 내 명대사로 꼽힐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앤드류는 이런 플레처의 커리큘럼에 휘말려,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한 반 미치광이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연애에 쓸 시간이 없다며 연인과 결별하고, 교통사고가 나도 병원에 가지 않고 연습을 하겠다며 달려오는 등의

교수의 눈 밖에 나기 전까지 계속 그에게 인정받으려는 모습을 보여주죠.

영화의 타이틀은 <위플래시>는 영화 내에서 주인공 앤드류가 직접 연주하는 곡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직역할 경우 앤드류와 학생들을 몰아붙이는 플레처의 "채찍질"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 역시 440번 환자의 피아노 강사처럼 마치 혹독한 훈육을 정당화하듯이 충분히 고통을 느끼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 일류가 되기 위한 역경과 고난은 충분히 이겨내야 할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굳이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이런 플레처의 커리큘럼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학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플레처가 교수직을 그만두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런 의문을 남기게 됩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할 가치가 있을까?

또한 그런 삶은 정말로 행복할까?

인간은 절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존재로서 인간은, 인간다움이라는 또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늘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인해 피로를 느끼고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완벽을 요구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완벽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완벽이 자신을 늘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근본적인 이유 역시 무엇인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성장과 성공을 위해선, 때때로는 자기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이 우리를 몰아붙이는 것보다 더 강하게 세상을 몰아붙여야 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과유불급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끝까지 갈 준비 역시 되어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성취에도 기쁨을 누림으로서,

그 만족감을 통해 내면에 잠들어 있는 잠재력을 증폭시키는 과정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는 일상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번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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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철학 : 함석헌

철학도의 일상 2022. 10. 15. 11:56



-원제
한국 근현대철학사의 마지막 민주투사
신천 함석헌과 씨알 사상

작성일자 : 2017.06.01

#1. 여는글
2017년 3월, 제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했던 국민의당의 안철수 의원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
함석헌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민중운동가, 사상가, 문필가였으며, 대한민국에서 무척 보기 드문 퀘이커 파 신도였다. 그러나, 본인이 도덕경을 연구하고 직접 강의도 하는 등, 특정 종교나 교파의 주장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함석헌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그를 ‘대한민국의 마하트마 간디.’ 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군사 정권이 지배하던 독재 시대에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비폭력주의와 사회사상에 매진하며 무려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로 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절대로 부족하지 않은 별칭이기도 하다. 다만, 간디와의 명백한 차이점 역시 존재하는데,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투쟁방식을 추구한 간디와는 달리, 그는 ‘비폭력 저항주의.’를 추구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설명하게 될 것이다.
 
#2. 함석헌/생애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일명 사자섬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허는 받지 못한 한의사로, 정규교육이 아닌 스스로 의술을 공부해 인근 마을의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50이 넘어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 정도로 배움에 열정이 있으신 분이었다. 친척 중에서도 의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숙부뻘 되는 함일형, 그리고 그의 자식들인 함석규, 함석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가담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2년 후 서울에 올라와 우연히 친척인 함석규 목사를 만나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이 때 교장이었던 유영모와의 만남을 가졌고, 이는 함석헌 본인이 신앙생활의 첫 번째 대사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유영모를 통해 노자를 처음 접한 그는, 이 시기에 H, G 웰스의 글인 <세계문화사대계>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세계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자신의 입장이 이 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1923년 도쿄로 유학을 떠난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의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여기서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 연구회에 들어가게 되는데,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우치무라가 교회의 형식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 전도를 시작하면서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했기 때문에 무교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함석헌은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만나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을 모아 1927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글도 발표한다. 
그러나 성서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으면서, 세속에 무관심하고 현대 정치에 냉담한 무교회주의에 회의감을 느낀 함석헌은 이를 계기로, 성서 이외에 불교나 노장사상에도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1940년대에 그는, 당시의 제국주의 사회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 평화주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가 전쟁을 초래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장사상 같은 동양 고전철학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방 이후, 그는 1945년 12월, 소련군정 치하에서 신의주 반공학생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되었고, 소련군에 의해 투옥되는 고초를 겪다, 1947년 가족을 두고 월남한다.
월남 후 함석헌은 성경공부모임을 만들고 공개강연을 하는 등,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활동을 이어 나갔지만,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집권세력과 결탁한 한국기독교의 모습을 목도하고, 1955년,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이 때, 마하트마 간디를 사회적 실천의 모범으로 보았으며, 비폭력운동을 통해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5. 16 이후와 대한민국 제 3공화국 시대에는 사상계에 ‘5. 16을 어떻게 볼까?’ 를 기고하면서, 언론이 5. 16에 대해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또한, 군인들이 어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이 글로 인해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그는 퀘이커 교도들과 교류를 가지고 퀘이커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몇 개월간을 체류하다 유럽으로 떠났다. 그 이후에는 퀘이커 교도가 된 채 귀국하여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한다. 1970년 그는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방식으로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비겁한 언론과 지식인과도 맞서 싸웠다.
이 싸움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 후 제 5공화국까지도 계속된다. 전두환 정권은 <씨알의 소리> 같은 비판적인 모습의 언론을 전부 폐간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강연을 비롯한 각종 투쟁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1984년, 그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으며, 1985년에는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 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별세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89세였다.



#3. 씨알 사상
함석헌의 사상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이나,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생명존중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생명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평화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의 핵심으로 民 대신 "씨알" 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한 바 있다. 본래 이 "씨알"은 1948년 무렵에 함석헌이 월남한 뒤 옛 스승이었던 유영모와 재회하여 그의 대학(大學) 강의를 듣던 중, 유영모가 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을 참신하게 여겨 고안해낸 표현이다. 그는 대학의 한 부분인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고,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무름에 있나니라" 라고 해석했다. 民은 백성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한자였기 때문에 백성이니 민초니 하는 한자 대신 순우리말인 "씨알"을 쓰자고 주장한 것이 그 시초이다.

또한 이 "씨알"은 그것 자체로 사상이기도 한데, 씨알 생명(=백성, 일반 시민들)이 지니고 있는 5가지 특성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체성 - 자신들의 이름을 "씨알"이라고 짓고 그걸 가짐으로써 주체성을 자각할 수 있다.

근본성 - 씨알은 씨앗과 알이며,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이다. 씨알 역시 인간 사회의 근본이면서도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으나, 결국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겼다.

순수성 - 알이라는 말이 접두사로 쓰이면 군더더기 없는 순수한 형태를 나타낸다. 씨알 역시 생명의 본질을 오염시키려는 악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고 비판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생동성 - 생명은 끊임없이 자라고 변화하며, 이에 따라 씨알(=시민들)을 압제하는 제도주의-형식주의-절대주의에 저항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관계성 - 나무나 잡초가 여럿이 있으면 태풍과 홍수를 막듯이 씨알 역시 무리를 지어서 삶의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4. 닫는 글
함석헌은 언제나 민중의 자리에서 민중을 위해 살아왔으며, 믿음과 행동, 생각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개인, 특정 지역, 특정 국가, 특정 민족 등의 경계를 넘어 전 우주의 생명과 평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생각은 곧 실천이었으며,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고, 자유, 자치, 자연의 가르침을 공유하였으며, 인간과 사회, 자연을 늘 함께 생각했다. 
에콜로지, 아나키즘, 세계민주주의, 비폭력주의, 생활의 절제, 평화주의, 민중민주주의, 직접행동주의, 공동체주의 등 함석헌이 추구했던 가치들 중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도 특히 그가 보여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함석헌을 ' 시대, 그 나라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대, 그 나라에서는 대단히 중요하고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 시대, 우리 나라에 맞게 충분히 재검토하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난무하는 폐단을 발본색원하고, 나라를 도로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함석헌의 사상을 더욱 완전하게, 비판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주체적이며 현실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함석헌과 그의 사상을 뛰어넘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인류 전체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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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프랑스철학 : 레비나스

철학도의 일상 2022. 10. 15. 11:55

 

1. 여는글 : 존재론의 모순과 이에 반한 자

고금을 막론하고 프랑스 철학에 처음 입문했을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철학자와 어구를 꼽으라면, 역시 데카르트와 그의 말로도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 보던 데카르트가 끝내 의심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서양 철학을 공부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식 주체 중심의 존재론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 중심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나의 세계"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조차도 "나의 세계"로 끌어들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본 글에서 다루게 될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E.Levinas/1906~1995) 되시겠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1906~1995)

2. 레비나스 / 생애와 사상

리투아니아의 코우노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유대인 예힐 레비나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던 그는 6세부터 집에서 히브리어 개인 교습을 받고, 성경과 탈무드를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외에도 리투아니아의 모국어였던 러시아어를 접하면서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슈킨 등의 작품들도 읽게 된다. 이들은 그의 사상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레비나스의 일가족은 우크라이나로 피신해야 했으며, 레비나스는 그로 인해 "어린 시절이 매우 짧았다."고 말한다.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말살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부모와 두 형제를 잃은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하고 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1923년, 레비나스는 프랑스의 쉬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28-29년에는 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의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그의 철학자로거의 활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다. 그의 철학적 경향은 전쟁동안 그가 겪은 경험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 학살과정에서 희생된다. 레비나스 자신은 프랑스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전쟁포로로 독일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며, 그의 부인과 딸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지냈다.

1930년,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오스트리아의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내세운 '나와 너'의 관계에 크나큰 관심을 가졌다. 레비나스가 주로 다루는 타자에 관한 문제를 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계기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34년, 레비나스는 <히틀러주의 철학에 대한 몇 가지 반성>을 내면서, 전면 전쟁을 감행하고자 하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위험을 만천하에 드러내려 한다. 폭력과 인종주의의 뿌리를 노출시키고 '다르게 사유함.' 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해보려는 치열한 노력도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이후 1963년 푸아티에 대학 철학 교수로 임명된 레비나스는 철학사를 가르치다 1967년 파리의 낭테르 대학을 거쳐, 1973년 소르본 대학의 철학 교수로 활동하다 1976년 정년퇴임한다.

이후 여생을 보내던 그는 결국 1995년 1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3. 타자성의 철학

서양철학은 존재자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존재자의 본질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인식론의 역사였으며, 그 중심에는 인간의 주체적 자아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자아중심적인 존재론과 인식론을 거부하고 윤리학이 그보다 더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생각하는 나」대신「윤리적인 나」가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윤리적인「나」는 누구인가? 윤리적인 나는 타자와 대면하여 자아중심적인「나」의 자발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나」이다. 윤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도덕성이 아니며,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해 주는 단순한 지침도 아니다. 윤리란 바로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자아중심적인 자발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자아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찾아 나서는데서 윤리는 시작된다는 것이다.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타인의 타자성에 근거한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이 열린다. 자아의 자기동일성 보다는 타인이 더 우선적이라는 데에 윤리적 의식의 본질이 있다.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타인은 우선적으로 자아에 대하여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외재성이다.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로 통합시킬 수 없는 절대적으로 다름, 즉 절대적인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 타인은 유한한 자아의 사유대상이 아니며, "떼어내어진, 절단된"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절대적 타자성」은 "자아에 종속되지 않고 자아로부터 절단된 타자성"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행동은 폭력이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강령이 분명해졌다.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대로 있게 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강령은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인정해 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정의는 사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정의에 기초한다: "amo volo ut sis"(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인 그가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랑이 타인을 절대적인 타인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라면 타인의 절대적 타자성은 어떻게 보증되는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타자를 만나야 하는가? 우리가 만나는 타자의 종류에 따라 그에 대한 위리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타자는 크게 사물로서의 타자와 타인으로 타자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세분된다. 우리는 사물로서의 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사물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어떤 목적을 위해 기여하는 도구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물에 대해 잘못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태도가 인간관계에까지 확장된다면 모든 관계의 파멸이다. 사물은 도구가 아니다. 사물에는 세계가 있다. 세계는 사방이다. 사방은 동, 서, 남, 북의 방위만이 아니다. 사물에는 하늘과 땅이 들어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있다. 하늘과 땅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며 하나님의 은총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의 존재의 보증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물로서 강물에는 그 물을 지탱해 주는 땅이 있으며, 그 물이 기원된 하늘이 있으며, 그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는 죽을 자들이 있으며, 죽을 자들을 위해 그 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있다. 우리의 세계는 하늘과 땅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는 사물 속에서 사방으로서의 이런 세계를 발견하며, 또 발견해야 한다. 사방으로서의 이 세계는 한 사물을 사물이게 해주는 사물의 사물성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물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 사물의 사물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사물에서 세계를 발견해야 하며 그 세계를 보호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세계의 거주자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보존하면서 사물과 함께 세계에 거주하는 자이다. 우리는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함께 거주하는 자이어야 한다. 어떻게 거주함이 마땅한가?

 

1. 인간은 그가 땅을 구원하는 한 거주한다. 그는 땅을 개발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작함으로써 거주해야 한다.

2. 인간은 하늘을 하늘로서 수용하는 한 거주한다.

3. 인간은 신적인 것을 신적인 것으로서 기다리는 한 거주한다.

4. 인간은 그의 고유한 본질 즉 죽음을 죽을 수 있는 본질에 순응하여 잘 죽을 수 있는 한 거주한다.

 

모든 문화와 문명은 이러한 거주함의 방식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 한에서 문명은 파괴가 아니고 건설이 될 것이다. 인간은 사물을 건설하면서 사물과 함께 세계에 거주해야 한다. 건설할 때는 사물 속에 들어있는 세계 즉 사방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의 탐욕스런 개발정책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그 결과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사물 속에 들어있는 세계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거기에 사유하는 인간의 본질이 있다. 인간의 사유능력은 바로 사물 속에서 세계를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인간은 사물로서의 타자를 대할 때 사물의 사물성을 고려해야 한다. 즉 사물 속에서 사방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타인은 도구도 아니며 사물도 아니다. 타인은 이 사물의 세계에 함께 거주하는 자이다. 우리는 타인을 함께 거주하는 자로 대해야 한다. 땅에 함께 거주하면서 하늘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자로 대해야 한다. 그런데 거주자들 사이에는「사이」가 있다. 이「사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얼굴」이다. 사람(人)은 사이(間)에 있으며 그 사이에는 얼굴이 있다는 것이다. 얼굴을 매개로 우리는 서로 만나며 또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통해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편에서는 타인이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는 뜻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얼굴을 가지고 타인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먼저 타인은 나에게 얼굴을 통해 다가온다. 내가 타인의 얼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듯이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타인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어떤 것인가?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의로 피할 수 없는 낯선 침입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단지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이러한 관계는 나의 주관적 지배성이 배제된 「관계성 없는 관계」이다. 즉 자아와 타자는 서로 상호침투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자아는 단지 타자를 지각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타자를 수용할 때 타자는 더 이상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내면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접촉점이 된다.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살기를 주장하기 이전에 먼저 타인의 절대타자성이 긍정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타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상생) 존재자로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 '(Ethics precedes ontology)' 라고 레비나스가 일컫는 "타자성의 철학." 이다.

 

 


4. 닫는글

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한 부모와 두 동생의 학살, 국사사회주의의 냉혹함, 스탈린주의와 테러리즘, 지역 간의 분쟁 등, 20세기를 점철했던 이 참혹한 현실들은 레비나스로 하여금 서양철학을 근본에서 톺아보게 했다. 레비나스의 결론은 서양철학과 전쟁이 깊이 결탁해 있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존재, 정신, 이성, 역사 따위를 중심축으로 하여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이런 시도는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동일성의 철학, 타자를 전체나 체계 속에서 파악하는 전체성의 철학으로 귀착하였다. 그런 한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질서를 통해 인간을 강제하며 인간의 인격성을 중단시키고, 전체의 미래를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전쟁은 서양철학의 전체론적 특성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이 전체주의로 발전하는 것을 레비나스는 두려워했다. 이미 나치즘이라는 사례로 이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서양의 근대는 이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근대적 주체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사회를 포함한 세계 전체를 이해한다. 이 근대적 주체에게 소위 근대적 이성은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봉사하였고, 세계는 계산 가능하고,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인간의 이해(理解)와 이해(利害)는 인간 간의 갈등으로 힘의 논리로 이어졌고 곧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으로 극화되었다.

레비나스의 사상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란, 폭력과 전쟁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전체론을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해 있는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타자’와‘ 윤리’다. 타자와 윤리라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뭐 타자와 윤리적 관계를 맺으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일까?

놀랍게도 레비나스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현재 우리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타자는 존중된다. 그 이유는 그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타자도 인격을, 인간의 존엄성, 자유, 권리 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에서 타자가 존중되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이 상실되는 한 즉 타자가 진정한 타자로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타자와 내가 또 무수한 타자들이‘ 동일한 독립적인 개인’으로 간주되는 한에서다. 타자의 다름과 독특성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자는 주장 또한, 나는 존중받아야 하고 나의 불가침의 영역은 안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배면이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권은 타인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면 타당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나의 자리가 나의 자리일 수 없다는 이 극단적인 윤리적 의식은 신자유주의와 경쟁 이데올로기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무시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제공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우리 모두가 성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레비나스는 단지 인간의 성스러움을 이야기할 뿐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근본적 됨됨이가 자기이해를 고수하고 확장하려는 코나투스적 존재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자기 삶에 대한 집착은 넘어서야 할 대상이다. 타자에 응답하는 책임지는 삶. 나의 것을 내어 타자를 환대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예로 든 과부, 고아, 이방인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존재한다. 우리 시대의 타자는 경제적 약자, 성적 소수자, 난민, 이주 노동자, 노숙자, 여성일 수도 있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자들, 혹은 직장을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내몰린 해고 노동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와 대면하는 그 모두가 타자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타자는 무한하고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경쟁이 판치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현대의 신 자유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이 얼마나 달콤하고 또 내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 강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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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철학 : 동학

철학도의 일상 2022. 10. 15. 11:53

 

 

원제 : 인간의 ‘행복’을 위한 ‘종교’
아수라장 속에서 떠오르며 빛났던 ‘동학’

작성일자 : 03.23.2017

 

1.여는글 : 혼돈과 종교

인간은 굶주린 상태에서 배부른 상태를 원해 왔으며, 비바람을 뒤집어쓰며 추위에 떠는 상태에서 견고한 지붕과 벽이 있는 집과 의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행복이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 정신적인 면에도 일정부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만족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정신적인 면을 추구하여 왔다. 한 가지 예로 죽음은 예측할 수 없는 불가피한 손실이나, 종교를 통해 사후(死後)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일정부분 해소하였다. 또한, 정토나 천국, 극락 등, 일종의 구원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으로써, 죽음을 여느 ‘손실’에서부터 앞날에의 ‘희망’으로 승화시켰다.

 

 

 

 

 

 

 

 

 


이를 토대로 파생된 수많은 종교에서는, 그 이념의 바탕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자’ 라고 하는 철학적 사상이 담겨 있어, 그 방법론은 종교나 종파에 따라 다양함으로 보이고 있으나, 종교에 참여하는 주체가 인간인 이상, 사회와는 동떨어져 지낼 수는 없다는 관점이 있어, 개개인의 사람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계율과 같은 형태로 방법을 제시하거나, 또는 설화 등을 이용해서 납득시키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에 따라, 사원, 교회 등 종교시설의 관계자는, 일종의 상담인(카운슬러)로서의 사회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며, 근대의 생활 속에서 삶의 고비마다 작용하는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다. 또한 지역 주민의 불안이나 고민을 해소하고, 또한 지역사회의 일체감을 향상시키는 시설이기도 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러한 종교시설의 기능이 잘 작동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종교관의 쇠퇴 때문에, 또한 신흥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으로 말미암아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요구되지 않는 예도 있다.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 문제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자살을 하는 일도 있어 상황은 단순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 치료사들과 심리학자들은 심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 그 종류에 상관없이 종교를 가질 것을 권장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역시 심신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통계 역시 존재한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각박해지는 사회 속에서 일명 “군중 속의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현실의 삶 속 어려움으로부터 위안을 얻으려는 것은 물론이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생활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사람들 역시 “자아실현” 이라는 현실 너머의 또 다른 가치와 만족감을 위해 신앙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는 현대뿐만 아니라, 아수라장 같았던 18세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2. 수운 최제우와 동학의 탄생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유명한 ‘평안도 농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농민봉기와는 달리, 당시 정권을 비판하고 농민의 의식을 통일하는 데 일조했으며,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동학교도들이 있었다.

 

 

초대 교주 최제우

 

이와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경주 출신의 몰락한 양반의 자제였던 최제선은 조선 사회의 가부장적인 법률로 인하여 출세할 수가 없었고, 이는 그에게 크나큰 의구심을 품게 해주었다. 각지를 떠돌며 상업과 수련에 열중하던 그는 결국 양성이 불평등한 사회의 불합리성과, 기존의 어떠한 사상으로도 나라의 부패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세상을 구제할 새로운 방도를 찾기 위해 방랑하기 시작한다.
방랑하던 도중 최제우는 한 승려에게서 ‘을묘천서(乙卯天書)’ 라는 서적을 받게 되었으나, 그 서적의 내용은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에 영향을 받은 그는 구미산의 용담정에서 거처하면서 이름을 제선에서 제우로 고친 후 수운(水雲)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860년 음력 4월 5일, 그는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 또한 고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출생케 하여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라는 일종의 게시를 한울님에게서 받게 된다.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끝없는 커다란 도’라는 뜻의 ‘무극대도(無極大道)’ 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1년 후 이 ‘무극대도’ 는 모든 이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을 가진 ‘시천주(侍天主)’ 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1년 1월 이 ‘시천주’를 내세우며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 김대건 신부에 의해 유입된 천주교를, 사람들이 ‘서학(西學)’ 이라 부르기 시작하자, 자신의 사상을 이와 구분하기 위해 ‘동학(東學)’이라 이름 짓는다.
그러나 동학은 천주교와 함께 신분제를 무시하고 제사를 거부하는 등 유교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조정은 천주교와 함께 동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최제우 역시 이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서술하였으며, 조정에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 자신의 제자였던 최경상을 후계자로 지목하는데, 그가 바로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이다. 최시형이 날품팔이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대 교주였던 최제우와 동학이 신분차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기존에 배워온 모든 학문이 동학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철저하게 신앙심과 능력만으로 인재를 뽑는다는 점을 실감할 수가 있다.

 

 

2대 교주 최시형

 

최시형은 최제우의 깨달음에 대해서 지은 <동경대전> 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간행하여 동학사상을 체계화했으며, 그의 사상이었던 ‘시천주’를 발전시켜, “사람은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겨라.” 라는 뜻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조정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동학을 비정치적 종교활동에 국한시키려고 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894년, 동학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 ‘동학농민운동’ 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탄압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 운동(伸寃運動)으로 시작되었지만, 운동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되었고 또한 민란과 결합되어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기치로 내걸은 농민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역할이 농민의 요구를 횡적으로 연결시킨 조직적 매개체 또는 단순한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농민 운동의 지도 원리로서의 동학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며 동학 자체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의 구제를 철저히 하려는 정치적 운동의 성격을 아울러 지닌다고 보기도 한다.
결국 동학군은 끝내 조선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으며, 2대 교주인 최시형 역시 1898년 처형되고 만다.

 

 

3대 교주 손병희

 

최시형은 1897년, 의암(義菴) 손병희를 후계자로 정하여 그 뜻을 이어 나가도록 했는데, 일본의 개화문물을 받아들인 손병희는 이를 활용해 국권의 회복에 힘쓰기로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동학에는 친일세력이 등장하는 부작용이 일어났으며, 손병희는 1905년 친일 세력을 배제한 정통 동학파인 ‘천도교’를 창설하게 된다. 그는 최제우, 최시형의 ‘시천주’, ‘사인여천’을 계승하여 “사람이 곧 한울이다.” 라는 뜻의 ‘인내천(人乃天)’ 으로 발전시켰으며, 이외에도 “나라를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동학을 천하에 퍼뜨린다.” 라는 뜻의 ‘포덕천하(布德天下)’, “널리 사람들을 구제한다.” 라는 뜻의 ‘광제창생(廣濟蒼生)’ 등 현실 개혁적인 구호를 제창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는 현실을 목도한 그는, 동학교도들에게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1919년 3.1 운동에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등 사회 주체로서의 민중을 만들어내고 참여하게 하는 데 공헌했다. 조선왕조 500년과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을 지배해온 이념이었던 유교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자, 동학이 등장하며 이를 넘어선 것은, 노동하는 민중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동학 사상

i) 시천주, 사인여천, 인내천

먼저 수운이 창설한 ‘시천주’에 대하여 알아보자. 시천주란 ‘한울님을 내 몸에 모셨음’을 의미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이 된다. 최제우는 한울을 한자로 표기할 때 천주(天主)라고 표기했었기 때문에 천주교도로 오해를 받았지만, 동학의 한울님과, 천주교의 하느님은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동학의 핵심 개념인 시천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울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시천주’란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과 일체가 되기 위해 자기의 인격수련과 올바른 삶의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최제우의 ‘시천주’에서 한울님 관념은 고대농경사회의 ‘한울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천(天)은 토질 및 인력과 더불어 핵심적인 중요성을 띠는 요소로서, 천신·지신·조상신 숭배사상을 낳게 되고, 점차 보다 큰 부족국가사회로 발전됨에 따라 천신위주의 ‘한울사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울이라는 용어는 한알·한얼·한·하늘·하느님 등으로 변형되어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최제우의 ‘한울’은 이러한 전통적 천사상(天思想)을 새로운 맥락 속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님’에 대해서는 최제우가 천주의 주(主)를 언급하고 있는 <논학문 論學文>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주(主)는 그 높은 덕을 찬양하여 부모와 같이 섬기는 것이다(主者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천주라는 말은 하늘에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님’의 의미를 붙인 것으로 ‘한울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학의 한울님은 서학의 천주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천주교의 천주는 라틴어의 데우스(Deus)를 옮긴 것이나, 동학의 천주는 우리 겨레의 전통적인 한울님신앙을 한자말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학에서 천주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서학에서는 천주가 신(神)을 뜻하므로 여기에 존경의 의미로서 ‘님’을 다시 붙여 말하는 것이다. 최제우도 동학과 서학은 “도(道)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道則同也 理則非也).”라고 하였으나, ‘천주’라는 용어상에서 같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동학과 서학이 다름없다고 보고 탄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대 교주였던 해월은 시천주에 담긴 평등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겨라” 라는 뜻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이라 한다. 인간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면 당연히 그를 모시는 인간 역시 고귀한 존재라는 이유에서이다. 더 나아가 그는 여성이나 어린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 역시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 역시 존귀한 존재로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외에도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 한울이 깃들어 있으며 인간이 다른 인간이나, 동물, 사물을 대하는 방법이 곧 한울을 대하는 방법이라 주장하였다.
해월의 ‘사인여천’은 3대 교주인 의암에 의해 ‘인내천’으로 이어진다. 모든 이가 한울을 섬기고 있으며, 모든 사람을 한울을 대하듯 대해야 한다면,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남들을 한울처럼 대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한울임을 깨닫고 이에 가까워지는 것. 한울님다워지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인내천’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당시 조선의 신분 차별 의식과는 양립할 수 없었으며, 모든 이가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모시고 있기에 인간사회의 법도를 통해 차별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이로서 상민과 천민이 정치적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ii) 수심정기
수심정기(守心正氣) 는 수운이 내세운 동학의 수행 방법이다. 해석하자면,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로잡는” 것이다. 해월은 이를 “마음의 근원을 맑게 하고, 그 기운의 바다를 깨끗하게 한다.” 라고 말한다.
타 동양철학과 마찬가지로, 동학에서도 마음과 기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음이 평안하면 기운도 평안하고,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기운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몸을 이루는 기운을 바로잡으면서도, 기운으로부터 나오는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는 의외로 간단하다. 만물에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면, 일상의 모든 것, 심지어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는 것까지도 한울님을 접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모든 것을 경건히 해야 하며, 특히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할 경우, 식음만 경건히 해도 우주의 근원적인 존재를 모실 수 있음을 강조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의 용이성을 가진 수행을 동학은 중요시 여겼다.

iii) 개벽
동학의 사상을 이해하고, 수행을 거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이다. 즉, 개개인이 군자가 되는 것이다. 동학에서는 한울님을 모신 모든 이가 군자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필요가 없는 유교적인 사고와는 다른 방식이다. 모든 이가 군자가 된다는 것은, 모두 인격의 완성체가 되는 것이요, 모두가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은 이를 “다시 개벽”이라 고 명명했는데, 태초에 세상이 열린 것이 “개벽”이라면, 현재는 모든 이가 군자가 되지 못하는 시대요, 모든 이가 군자가 되는 시대가 마치 세상이 열리듯,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이를 토대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기존 신분질서를 유지한 채 최상위 지배층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신분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혁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닫는글 : 동학의 한계와 의의
동학은 신분을 막론하고 사회, 정치적인 주체로서의 개개인을 만들 수 있게 하였으며, 지금까지 단순히 세상에 대한 분노만을 표출하던 민중의 봉기가, 그 분노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의를 보여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그 주체가 될 수 있음 역시 강조했다. 그들의 말 그대로 ‘보국안민’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각성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동학의 기본적인 이념이었던 ‘시천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주의 근원을 모시는 인간이야말로 사회운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유교의 질서가 붕괴된 조선후기 사회에서 일반 백성들의 의식 속에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면, 동학은 그 갈망을 실체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학은 이와 동시에 하나의 종교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는 기복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해서 신앙 생활에 대한 보상심리가, 즉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보상과, 그리고 이에 대한 기대가 작용하는 경향도 농후하다. 참된 종교적 활동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게 하며,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지지받고 명예로운 삶, 혹은 배려와 희생을 통한 가치의 실현에서 비롯되는 희열을 얻음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행복감을 성취하게 해주는 것이다. 비록 자유와 행복이 그 동기였다 할지라도, 그 소명에 대한 사명감이나 진정한 수양의 계기가 발현되지 않는다면, 지속적으로 만족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동학과 동학농민운동이 단순히 상류층의 탄압과 이에 대한 보상을 목적으로 탄생했다면, 그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행복 역시 변질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반에 물건을 올려놓기 전에 선반의 먼지를 모두 떨어내야 하듯, 신앙생활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기 이전에 진정한 행복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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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터벨트 : 의외로 사람들이 모르는 칸트의 또다른 업적

철학도의 일상 2022. 10. 15. 11:48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순수이성비판>이나,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등 여러 업적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가터벨트를 고안해 낸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가터벨트는 남성전용 속옷이었는데, 신축성이 부족한 긴 양말을 허리끈에 연결해 고정하는 것이 가터벨트의 시초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양말의 신축성이 좋아지면서 가터벨트의 기능은 사라지는 듯 싶었으나, 여성의 나일론 스타킹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가터벨트는 나일론 스타킹을 고정하는 데 사용되는 여성용 속옷으로 바뀌었으며, 오늘날에는 여성의 색기를 발산하는 야한 속옷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칸트가 고안해 낸 남성전용 가터벨트의 흔적으로는 현대에 와서는 남성의 긴 정장용 양말을 고정하기 위해 종아리에 착용하는 벨트 형태의 가죽끈 "가터" 만이 남아있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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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마인드/418번 환자 - 참전군인의 PTSD를 통해 보는 전쟁론의 재해석

2022.06.23
전편에서 다룬 네버마인드를 이어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루게 될 환자는 첫 스테이지에서 조우한 251번 환자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경우 조우할 수 있는 418번 환자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게임에 대한 소개와 정보는 전편 글을 참조하시길 바라며, 바로 리뷰를 시작해보도록 하죠.

전편보기

카페

https://cafe.naver.com/philosophyandtalk/1966

 


 

418번 환자

일련의 사건 후 연구소에 수용된 노숙자입니다.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며, 공격성을 보입니다.

트라우마와의 연관성이 의심되는 환자입니다. 정신 조사 전의 기존 인터뷰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검사 이전 환자의 진술

언젠가 나와 함께 지옥에 갈 겁니다!

난 괴물이에요.

아니... 아니야. 괴물은 그 사람들이에요.

다들 날 재수없게 여겨요. 하지만 정말 재수 없는 건 그 인간들이죠. 그 사람들이 늘어놓는, 전화가 끊어졌다거나 천의 실이 몇가닥인지 센다든가 하는 것들요.

세고... 세고... 세고...

실수를 세고... 실수를 세고... 실수에는 피가 묻어 있어요.

내 실수... 내 피가 아니야... 내 피가 아니야... 왜 내 피가 아니죠?

난 세상을 구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망할 놈의 세상을 구해야 하는 거죠?

이번 스테이지의 시작은 극히 평범한 거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하지만 부유한 도시의 모습이라기보단 마치 슬럼가를 연상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페이즈에서는 점프스케어나 공포심을 부각시킬 만한 요소가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쓰레기통 속에서 깡통을 발견해 주울 수 있는 상호작용 요소만이 존재합니다.

캔 재활용 부스입니다.

한국에서는 흔한 기기는 아니지만, 미국 등의 번화한 해외 거리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기기로, 캔 재활용을 위해 깡통을 따로 모을 수 있는 일종의 분리수거함이며, 캔을 넣을 때마다 동전 하나를 줌으로서, 재활용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동전 획득

동전을 분수대에 던질 수 있습니다.

미래를 불 속에 던져라, 그리고 새롭게 돌아오라

이는 MMA 선수 마이클 챈들러의 명언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최악의 경우 패배의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을 불 속에 던져라.

승리의 전율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Throw yourself into the fire so at worst you can feel the agony of defeat,

but at best you will feel the thrill of victory while daring greatly.

동전을 분수대에 던지자 거리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니,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 듯한 이미지들이 주마등처럼 출력됩니다.

이번 의뢰인의 트라우마는 전쟁터와 연관된 것이며, 거리에 떨어진 것은 아무래도 포탄이었던 것 같군요.

그리고 환자의 트라우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듯, 초토화된 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건물과 거리 곳곳에 보이는 기괴한 마네킹과 그 팔은 덤

불에 그슬린 마네킹들이 보입니다. 마네킹에 접근하면 플레이어에게 데미지를 주면서 잡음과 함께 플레이어(혹은 의뢰인으로 찾아온 환자)를 비난하는 듯한 말투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필드에서 하나둘씩 사건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거리의 네온간판에서 출력되는 비난의 메시지

표지판의 빈 공간을 화살표 모양으로 만들면 열리는 문 형태의 퍼즐

문을 열자 귀신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귀신들은 딱히 플레이어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으나 게임이 끝날 때까지 내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계속 필드에서 보이는 불에 그슬린 마네킹들

죽어라, 꿈꾸어라, 반복하라.

영어권에서 자주 등장하는 명언 중 하나인 Dream, Believe, Do, Repeat를 비틀어 놓은 듯한 문구로 추정됩니다.

3, 6, 5라는 비밀번호를 의미하는 오브젝트

3마리의 쥐 시체, 6개의 술병, 그리고 5개의 주사기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이번엔 약상자를 든 마네킹들이 보입니다.

약에 접근하자 마치 마약을 복용한 듯한 카메라 흔들림 연출을 보여줍니다.

 

마약으로 인해 배경의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플레이어(혹은 의뢰인)을 비난하는 간판 속의 메시지.

그리고 필드에서 보이는 더 많은 단서들.

다른 단서를 찾아 필드 안의 건물로 진입하자, 마약의 후유증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뒤틀린 복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을 열려고 하지만 참호를 만들 때 쓰는 사대 더미에 가로막혀 더 이상 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보여주더니,

끝없는 계단과 함께 등장하는 수많은 귀신들.

귀신들은 여전히 플레이어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사대가 문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건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다다르지만, 웬 퍼즐 하나가 가로막고 있군요.

버튼을 누르면, 누른 버튼의 상하좌우에 위치한 다른 버튼의 불이 켜지거나 꺼지는 방식의 퍼즐로, 모든 버튼의 불을 켜거나 꺼야 합니다.

모두 켜서 완료.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또 다른 단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며 방금 전의 계단과 귀신들의 모습이 다시 나타납니다.

떨어지자 도착한 곳은 바로 방금 전의 마약 상자를 들고 있던 마네킹들이 있던 곳.

이곳에서 나가 다른 단서를 찾아봅시다.

다시 평범한 시내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거리에는 여전히 불에 그슬린 마네킹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시 쓰레기통을 뒤져 보니 이번에는 구급 상자가 보이는군요.

상자 안에는 대검이 들어 있었습니다.

대검을 들고 바닥에 누워 있는 상처투성이 마네킹의 손을 찌르자, 마네킹이 입에서 웬 토큰을 토해냅니다.

그리고 처음 시작할 때는 보이지 않던 놀이동산의 입구

토큰을 입장료로 지불해 놀이동산에 들어갑니다. 여전히 입구 복도는 마약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듯, 뒤틀려 있군요.

필드에서 계속 볼 수 있는 마네킹이 배치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범한 놀이동산의 모습

그리고 놀이동산에 있는 오늘의 운세를 연상케 하는 게임기에서 출력되는 메시지.

여전히 플레이어에게 맹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롤러코스터에 접근하자, 탑승자들의 비명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화면에 핏자국이 맺힙니다.

마치 전장의 아수라장과 민간인들의 아비규환을 묘사하듯이 말이죠.

놀이동산 역시 기괴한 모습과 귀신이 가득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다급한 무전 소리와 총성이 계속해서 플레이어의 귓가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전쟁터에서 겪은 트라우마가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인해 재발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전쟁터에서 표적을 놓치면, 순식간에 자기 자신이 표적이 되어버리는 것이 바로 군인의 숙명.

그리고 전쟁터에서 생기는 트라우마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메시지를 모두 출력한 점쟁이 게임기가 폭발하면서, 다시 한번 놀이동산의 모습이 바뀝니다.

전쟁터에서의 실패의 대가는 곧 죽음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시뻘건 해골의 컷신이 출력됩니다.

마지막으로 전쟁터의 참상이 그대로 투영된 듯한 피범벅된 놀이동산이 보이는군요.

회전목마에도 목마 대신 마네킹이 봉에 꿰뚫린 채로 매달려 있습니다.

겁먹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면 마지막 단서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자기 자신과 아군이 곧 선이요, 적들은 악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전쟁터에 뛰어들지만

사실 전쟁터에서 조우하는 적들도 결국에는 평범한 인간이고, 병사임을 깨달을 때 이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이것이 전쟁터에 대한 트라우마를 만드는 원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참전군인들의 인터뷰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이기도 하죠.

모든 단서를 모으자 플레이어를 구출하러 오는 듯한 헬기 소리와 함께, 스테이지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필드가 사대 방벽으로 봉인되어 더 이상 필드를 둘러볼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전편과 마찬가지로 모아 놓은 열 개의 단서 중 다섯 개의 진실을 찾아서 올바른 순서대로 배열해 봅시다.

역시 다섯 개는 진실, 나머지 다섯 개는 거짓.

- 부모님은 한 번도 날 이해해준 적이 없습니다. (FALSE)

- 누구를 구하고 누구를 파괴해야할지, 그걸 잊어버렸다. 좋았던 기억도, 안전하다고 느낀 기억도 없다. (TRUE)

- 난 어딘가 이상했다.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FALSE)

- 하지만 뭔가를 구하려면 다른 뭔가를 부숴야 할 때도 있다. (TRUE)

- 난 늘 자기혐오와 불신에 시달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그것들에 목소리를, 힘을 주었다. (TRUE)

- 난 가끔 재미로 벌레를 해부했다. (FALSE)

- 그것들은 그저 한 번으로 그치는 노래를 부른 게 아니다. 수백 개의 속삭임이 만드는 흥얼거림, 그런 거였다.

난 늘 그 것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내가 절대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다. (TRUE)

- 그것들은 증오로 가득한, 성난 사람들이었다. (FALSE)

- 난 십 대 때부터 그것들을 썼다. (FALSE)

- 나는 용사였다.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TRUE)

그리고 또다시 밝혀지는 진실.

참전군인이었던 의뢰인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여가면서 점차 인간성이 무너져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혼령이 보이는 환각과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환청이 계속되었고 이를 잊고자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어느날 어떤 놀이동산에 입장했다가 롤러코스터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소리에 전장에서 울려퍼지던 비명소리를 연상해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체포되어 연구소에 수용된 거였죠.

그리고 의뢰인을 괴롭히는 트라우마를 치료하고자, 뉴로스탤지아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번 스테이지에서 다루어진 소재는 PTSD의 일종인 전투전 증후군입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겪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장병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쟁 상황과 똑같이 느끼고 행동하는 정신질환의 일종이죠.

오늘날의 전쟁터에서는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연속적으로 전투를 강요받는 경우가 다반사가 됩니다.

죽거나 다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물론이요, 총성과 폭발로 만들어지는 굉음, 그리고 전우의 사망 등 불안과 공포, 그리고 좌절을 느낄 수 있는 요소는 차고 넘칩니다.

그리고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과 함께 발생하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투는 병사의 심신 모두를 피폐해지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죠.

이를 군사학적 용어로 전투전 증후군이라고 하며, 정신적으로 건망증이나 집중력 저하, 심지어는 기행 등의 증상을 보이는 것이 주된 특징입니다.

심리적으로는 불안감, 불면증, 악몽, 죄책감, 신경질 등을 유발하기도 하며, 이것이 몸의 병으로 이어지는 경우 역시 다반사입니다.

또한, PTSD를 겪고 있다고 해서 사람 자체가 바로 폐인이 되거나 24시간 내내 공포에 떨면서 지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를 가시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이를 판단해 치료하는 것 또한 몹시 어려운 과제입니다.

지금도 어딘가의 군영에서는 병사들이 이에 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밤에는 안정제를 복용하거나,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국에서도 월남전 참전군인들이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악몽 때문에 신경정신과나 종교 시설을 방문하는 경우를 자주 찾아볼 수 있으며, 자살이나 자살미수로 이어지는 일도 흔히 보이는 사례임을 알 수 있듯이 말이죠.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을 생각해보면, 남한인들에게 있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조국수호를 위한 전쟁이요, 월남전 역시 반공이라는 강력한 명분이 있었지만, 그 애국심이나 애향심도 PTSD 자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전쟁으로 인한 PTSD는 심리학 역사상 처음으로 '남성에게도 정신질환의 발생여지가 있다.'라는 사실을 증명해준 사례이며, 정신질환의 대상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간 전체로 확장되어 연구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서양철학사에서 거론된 전쟁론에 대해서도 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간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군사적 수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으므로, 군주는 전쟁의 준비와 실행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현실의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을 자신의 이론 속에 포섭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홉스는 전쟁을 미화하거나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국가의 등장을 통해 인간 사회의 안정과 역사적 발전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틀에서는 현실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 을 통해 전쟁을 제도적 차원에서 방지함으로서 세계 평화와 질서 유지를 꾀할 것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세계시민권이라는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할 것과, 국가의 헌법이 공화주의에 입각해야 할 것임을 내세웠죠.

이는 오늘날의 인권, 민주주의 개념과 유사하며, 평화라는 인류 궁극적인 문제를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 사례로 꼽힙니다.

그리고 1920년 탄생한 국제 연맹의 이념을 통해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계승됩니다.

칸트에 이어 헤겔은 전쟁 상황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 금지나 초토화 작전 금지 등의 국제법 존중을 강조했으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에서 발생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사건처럼 기존의 국제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발생하는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나 최근의 러우 전쟁에서 발생한 전쟁범죄 등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헤겔의 이상적인 이론이 오늘날의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전쟁이 발생하면 인간과 사회 뿐만 아니라, 전쟁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것.

즉, 전쟁터와 그곳의 모든 것이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습니다.

환경의 파괴와 오염은 기본이요, 자원과 물자의 낭비,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는 생태계와 인간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구성원이므로 이런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인간의 정신 세계 역시 그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들은 전쟁 현상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거부한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국가 운영과 정치 활동 등에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할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는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며, 이에 대한 대책을 다방면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전쟁보다 평화가 더 좋다는 이상적인 탁상공론 대신, 역사 속에서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전쟁이라는 재앙이 또 벌어졌을 때, 이를 수습할 대책이 여러모로 필요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지기 바라며, 플라톤의 전쟁 명언과 함께 이번 글을 마무리합니다.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볼 수 있다." - 플라톤

참고문헌 : 충남대 철학과 서영식 교수 논문

「서양 근대의 전쟁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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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서적 발제문

철학도의 일상 2022. 10. 15. 11:36

 

 

1. 여는글 - 세 번째로 등록된 한국인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2019년 11월, 유네스코는 2021년의 세계기념인물로 김대건 신부를 지정했다. 2012년 탄생 200주년을 맞은 다산 정약용과, 2013년 동의보감 발행 400주년을 맞은 구암 허준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다.

 

2021년은 1821년 탄생한 김대건 신부의 2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김대건 신부는 당시의 국가였던 조선 계급 사회 내에서 기득권의 삶을 포기하고 평등과 존엄, 생명, 진리 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인물이자, 1784년 천주교가 한국에 전해진 이후 61년만에 탄생한 최초의 한국인 사제요, 10개국 이상에 주보성인 성당까지 존재하는 성인임이 그 이유라고 유네스코는 밝혔다.

 

유네스코 기념 해는 2년마다 지정되며, 기념 인물 후보자는 1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보편적 지명도와, 50주년/100주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을 기념할 수 있어야 한다. 김대건 신부는 당시 국가였던 조선에 천주교와 그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과 대만, 심지어 필리핀까지 오가며 신학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조선 사람들에게 열성적으로 천주교를 알리다 순교하였으며,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기념했기 때문에 이 조건에 모두 부합한다. 본 글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발행한 서적을 토대로 그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것이 갖는 역사적, 철학적 가치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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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에 위치한 솔뫼성지의 김대건 신부 생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여 헌화와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

(08.15.2014)

 

2. 김대건 신부의 생애

 

1784년 최초의 세례를 받은 이승훈을 시작으로 조선에 천주교가 유입되고, 10년 후 조선으로 밀입국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활동으로 천주교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1800년대에 이르러 조선의 천주교도는 어느새 만 명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나 천주교 탄압에 소극적이었던 정조가 죽자,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300여명의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기반이 무너졌으며 생존한 교인들의 대다수가 신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 중에는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그리고 종조부 김종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대건은 1821년 충남 당진의 솔뫼마을에서 김제준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827년 정해박해 이전에 가족과 고향을 떠나 용인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의 피에르 모방 신부(1803~1839)가 지방 교우촌 순방을 목적으로 용인의 은이 성지를 방문할 때즈음 김제준 가족도 그곳으로 가서 성사를 받았고, 이 때 모방 신부는 어린 김대건을 보고 신학생으로 선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가 1836년 7월 11일이었다.

 

당시 모방 신부는 이미 같은 해 2월 6일에 최양업(1821~1861), 그리고 3월 14일에 최방제(불명~1837)를 신학생으로 선발한 상태였으며, 거처였던 정하상(정약종의 차남, 정약용의 조카/1795~1839)의 자택에서 이 두 소년에게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김대건 역시 모방 신부를 따라 이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이 셋이 배우던 언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신학 수업에 가장 중요한 라틴어였을 것이라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추측하고 있다.

 

1836년 12월 2일, 조선 신학생 셋은 모방 신부와 십자가 앞에서 조선교구 신부가 되어 봉사할 것임을 서약하고 서울을 떠나 약 7개월 후인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한다. 그리고 임시로 설립된 조선 신학교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들에게 불어, 라틴어, 신학, 서양철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최방제가 위열병으로 사망했고, 그들은 1839년 4월의 마카오 소요 사태를 피해 필리핀의 롤롬보이 (마닐라 인근의 도시)로 피신하여 계속 교육을 받았다.

 

이후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2년까지 여러 선교사들의 교육을 받아오면서, 2월 15일 중국의 외교 사절을 목적으로 파견된 프랑스 군 장교 세실 함장의 군함인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된다. 조선 원정을 원했던 세실 함장과 이를 통해 조선 교회와의 연락을 재개할 계획을 세운 리브와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가 이들을 통역을 위해 동행할 수 있게 해 준 덕분이었다.

 

마카오를 떠난 이들은 마닐라, 대만, 만주 등을 오가며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1843년 4월, 만주에 자리 잡은 작은 교우촌인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소팔가자에서 김대건은 그곳의 주교인 페레올을 만나고 그의 지시를 따라 1844년 2월 5일 입국로 탐색을 위해 거처에서 2천리나 떨어진 두만강 하구의 도시인 훈춘으로의 여정을 감행한다. 2개월 후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동년 12월에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게 된다. 부제품을 받게 된 정확한 날짜는 기록에 없으나, 1844년 12월 10일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안드레아(김대건)과 토마스(최양업)은 이미 부제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12월 10일, 혹은 그 이전에 부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를 먼저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고 입국을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김대건 부제는 1월 15일 의주와 평양을 거쳐 한양에 도착한다. 조선을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귀국한 김대건 부제는 해로를 통한 입국을 위해 배를 구매하고, 지도인 조선전도를 제작하였으며 서울 석정동에 선교사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한 후 열한 명의 신자들과 함께 제물포에서 상해를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닷새 간의 험난한 항해를 거쳐, 김대건 부제 일행은 중국 배를 만나 보호를 받으며 상해 앞바다인 오송에 도착했고, 오송에 주둔한 영국군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1845년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마카오에 있던 페레올 주교는 상해에 도착했다는 김대건 부제 일행의 연락을 받아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로 달려갔고, 이들은 상봉에 성공한다.

 

동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의 업적을 치하하여 상해 부근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서품식을 거행하였고, 이로서 김대건은 한국 역사상 첫 번째 신부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24일 상해의 횡당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열었으며, 31일에는 함께 여정을 떠났던 열한 멍의 신자, 페레올 주교, 그리고 다블뤼 신부와 함께 조선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 일행의 항해는 순조롭지 못했고, 그들의 배 라파엘호가 여러 번 침몰의 위기를 겪다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 표착한다.

 

이후 라파엘호는 제주도를 떠나 전라도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면서 일행은 강경 부근에 위치한 교우촌인 나바위에 도착하게 된다. 이 때가 1845년 10월 12일이었으며,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조선어를 배웠으며, 김대건 신부는 그 인근, 특히 용인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만난 모친과 부활절을 보낸 후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는 해로를 통해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한 통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들어 만주에 머물고 있는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다. 의주 장면의 국경 감시가 삼엄해지자, 결국 두만강 근처의 경원을 통해 시장이 열리는 때를 틈타 둘을 입국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선 국경에 있는 마을에 머물며 입국할 때를 기다리다 중국 관리에게 발각되어 오랫동안 심문을 받고 요동으로 쫓겨나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첫 계획이 실패하고, 김대건 신부는 1846년 5월 일곱 뱃사공과 함께 백령도에서 어업을 하고 있던 중국 어선들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일행의 동선 중 하나였던 순위도의 등산첨사인 관장이 중국 배들을 쫓아내기 위해 김대건 신부 일행의 배를 빌리고자 했고, 신부는 공사로 양반의 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조선의 법을 내세워 배를 빌려주지 않았다.

 

관장은 이를 의심해 포졸들로 하여금 뱃사공을 잡아 온갖 신문을 거듭한 끝에 김대건 신부가 천주교도임을 알아차리고 1846년 6월 5일 밤 김대건 신부는 체포되고 만다.

 

체포된 김대건 신부는 6월 13일부터 7월 19일까지 여섯 차례나 혹독한 문초를 받았으나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똑같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관련자를 대거나 신부로서의 소명을 회피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순교의 각오를 다지며 세 통의 서한을 쓰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렸다. 하나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최양업 부제에게, 또 하나는 페레올 주교에게, 마지막 하나는 조선의 모든 천주교 신자들에게 남기는 서한이었다.

 

그리고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26년이란 짧은 생은 열두 망나니의 칼질로 막을 내리게 된다.

 

관리들은 김대선 신부의 시신을 새남터에 묻고 신자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감시인까지 붙여 놓았으나, 이후 젊은 교우들이 심야를 틈타 시신을 수습하여 안성 미리내에 이장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1991년, 미리내 성지에 김대건 신부와 이에 연관된 인물들의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 성당>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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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의 김대건 신부상

 

3. 김대건 신부의 업적

 

1837년부터 1842년까지 마카오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학문을 익힌 김대건 신부는 불어, 라틴어, 중국어까지 활용하여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총 서른한 통의 서한과, 사제와 수도자를 주제로 하여 신앙의 교훈을 설명하는 라틴어 작문 시험 답안지,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며 페레올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보고서였던 <훈춘 기행문>, 그 과정에서 그린 지도 <조선전도>, 그리고 서한들 중 열여섯번째 서한에 동봉된 <조선 순교사 보고서>이다.

 

이외에도 옥중에서 영국산 세계 지도를 번역하였고, 채색한 두 장의 세계 지도와 이에 기반한 <지리 개설서>를 편찬했다고 알려지나, 오늘날 전해지지 못했다.

 

또한 선교 활동과 프랑스 선교사 입국로 개척 역시 그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데, 1845년 사제품을 받고 1846년 순교하기까지 약 13개월간이라는 짧은 사목 생활이었으나, 진지하게 성서를 집전하고 교리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데 정성을 다하여 많은 인망을 얻었다. 체포된 이후에도 옥중에서 함께 갇혀있던 교우들에게는 고해성사를 통한 격려를, 예비 신자들에게는 세례를, 그리고 자신을 체포한 관장과 포졸들, 그리고 조정 대신들과 감사들에게도 적극적인 선교를 일삼았다.

 

본 발제문의 참고자료였던 기념서적의 저자 김정수 신부(1947~현재)는 김대건 신부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위대함이 바로 이 시기와 상황에 개의치 않고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했던 시도에서 나온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김대건 신부의 이 짧지만 강렬한 생애는 종교와 정치, 삶과 신앙, 국내와 국외의 여러 영역을 거치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삶의 지표를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희년이다. 일곱 해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번 지나야 오는 50년마다 돌아오는 해요, 성경은 이 해를 거룩하게 지내라 명시한다. 하느님이 주시는 해방과 평등을 가시화하는 해로 지내자는 것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21년 김대건 희년 주제를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라고 정했다. 김대건 신부의 서른한 통의 서핸 중 스무 번째 서한에 담긴 문구이자, 관아에 체포된 김대건 신부에게 한 관장의 질문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이에 망설임 없이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했으며, 175년이 지난 지금 이 물음은 다시 천주교인들에게 돌아온다. 성인이 지녔던 확고한 신앙을 되새겨 천주교인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되묻고 있는 셈이다.

 

4. 닫는글 - 175년만에 돌아온 물음

 

김대건 신부의 만 25년의 삶을 냉정하게 살피면, 당시 조선 정부에 반하는 운동을 일삼으며 각국, 각지를 오가던 젊은이가 잡혀서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죽은 것일 수도 있다. 이에 한 술 더 떠서 조정에서는 이런 불순분자를 처형했으니 조선의 체제를 수호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모든 성인들의 특성은 그들의 주인이 부르시면 즉시 자신이 몸담은 곳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고향일 수도 있고, 고국일 수도 있으며, 현재 살아가고 있는 지상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모든 진리를 향한 호기심에 대한 해답은 항상 대가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요, 진리를 위해 떠난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걸고 떠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는 단순히 신학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학문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묵묵히 임했던 김대건 신부는 단순히 종교에 대한 열정을 지녔던 신부로서만 보아야 할 인물이 아니다. 그의 업적과 생애에 담긴 정신과 마음을 이해하고, 이를 현 시대와 연결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작성자 금강야차. 07.18. 2021

 

참고자료 : <성 김대건 바로 알기> - 김정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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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마인드/251번 환자 - 환자의 트라우마로 보는 라캉의 사상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2015년 발매된 Flying Mollusk 사의 PC게임 <네버마인드>입니다.

구매자들이 지불한 금액으로 추가적인 콘텐츠를 확장해 나가는 방식의 퍼즐/호러 인디 게임으로, 스팀을 사용하고 계시다면 언제든지 게임을 구매하여 플레이해 보실 수 있습니다.

공식으로 한글자막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주된 내용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환자의 정신세계를 탐험하여, 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며, 이를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업체 뉴로스탤지아 (Neurostalgia Institude) 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정신과 의사이자 뉴로스탤지아 사의 신임 정신탐험 요원이 되어 환자들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는 줄거리의 게임이 되시겠습니다.

2019년 기준 현재 튜토리얼을 제외한 4명의 환자가 업데이트되어있으며, 각자 다른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안고 있기 때문에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정신세계 속에 부여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이 게임의 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번에 리뷰할 대상은 튜토리얼을 마치고 플레이어들이 만날 수 있는 첫 환자인 251번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게임을 시작하기 전 환자의 대한 간략한 정보와, 당사자의 짤막한 인터뷰가 출력된 후 게임이 시작됩니다.

251번 환자

이 환자는 시선 공포증이 있으며, 어머니의 사망 후 증상이 더 심해진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트라우마와 관련된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검사 이전 환자의 진술

음...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무거나 상관없나요?

그래요... 음... 그러니까...

전 20년 동안 부동산 일을 했어요. 여기서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대학을 졸업했고요.

결혼은 한 적 없어요. 외동딸이고요.

늘 고양이를 좋아했어요. 하하...

교회는 질색이에요. 윽!

늘 혼자 지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절 보는 시선이 정말 싫거든요. 특히 요즘에는 더 그래요.

솔직히... 뭐랄까, 몇 년 전까지는 저도 평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는... ... 그때부터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죠.

사람들이 자기를 그냥 쳐다보는 기분 같은 거 느껴본 적 있어요? 방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전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거에요. 나한텐 말해주지 않고요.

모르겠어요. 그냥... 주변에 사람들이 있으면 기분이 안 좋아져요. 죄책감 같은 게 들고 막 화가 나요.

어릴 적에는 꽤 행복했던 것 같네요.

아빠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요. 엄마 말로는 자동차 사고였대요. 전 기억은 안 나지만요. 제가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전 아빠랑 늘 직소 퍼즐을 맞추고 놀았어요.

아빠는 사업하시는 분이었고요. 늘 우리 집 돈 문제 얘기를 하시던 기억이 나네요.

엄마랑은 사실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긴 하네요.

*웃음* 아... 엄마는 와인을 좋아했어요. *웃음*

아... 정말... 왜 이렇게 돼버린 건지 모르겠네요. 어릴 땐 아무 문제 없었는데...

인터뷰를 마치면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됩니다.

게임의 목표는 환자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며 찾아낼 수 있는 그림 형태로 된 총 열 가지의 단서를 확보한 후, 그 중에서 진실된 단서 5개를 찾아내 순서에 맞게 배열하는 것입니다.

심각한 환자의 정신상태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는 집들

찻잔과 곰인형

청구서로 보이는 우체통의 편지

게임 내에서는 플레이어의 심박을 감지하는 장비를 추가구매하여 플레이 하기 전 PC에 장착할 겅우 심박수가 올라갈 때마다 배경의 분위기가 더 무섭거나 기괴하게 변하는 바이오피드백 시스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려면 불을 꺼야 한다는 뜻의 메시지와 옆에 놓인 전등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계속 볼 수 있는 찻잔

우유/총/슬픔 을 의미하는 그림

(소, 총기 허가증, 그리고 초상화에서 지워진 부친의 얼굴)

이후 이 암호를 그대로 금고에 입력하면 또 하나의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방에 들어서자 갑자기 우유가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냉장고

냉장고를 열자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나고 아버지란 태그가 붙은 시체 가방이 보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죽은 모양입니다.

수많은 시체 가방은 덤

이번엔 차고로 들어섭니다. 차고 뒤쪽에 또 길이 나 있고 차가 지나다니고 있습니다.

차도를 무사히 건너자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순간이동.

시끄러운 차량의 클랙슨 소리와 함께 "기억해 내(Figure it out)" 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들립니다.

우여곡절 끝에 길을 찾자 보이는 기괴한 얼굴이 가득한 풍경과, 부친으로 보이는 권총자살한 남자의 시신이 그려진 그림.

심지어 이 얼굴들은 플레이어가 아무리 움직여도 동공의 시선을 플레이어에게 고정하고 있습니다.

단서를 찾아 탈출하자 이번에는 교회의 예배당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앉은 마네킹들의 시선 역시 플레이어를 향해 고정되어 있습니다.

물이 흐르는 원반에 찻잔을 집어다 붙이면

찻잔에 물이 담기며 원반이 회전을 하고, 원반 중앙의 눈이 떠집니다.

그리고 부친의 시신이 담긴 관짝이 열리며 마지막 단서를 획득하죠.

그렇게 열 가지의 단서를 모두 모으면, 이제 마지막 단계인, 단서의 배열만이 남게 됩니다.

반은 진실, 그리고 반은 거짓.

게임 내의 단서 (5개는 진실, 5개는 거짓)

-난 차를 마시고 있었지. 그 날은 정말 더웠다! 엄청 목이 말랐던 기억이 난다! TRUE

-아빠와 아빠의 편지다. 우체부 아저씨가 새 편지를 가져 올 때면 아빠는 나랑 놀아주지 않으셨다. FALSE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는 갈아 만든 포도 주스였다. 냄새는 정말 최악이었다. FALSE

-어머니와 아버지는 거의 집에 있는 날이 없었다. 꽤 외로웠던 것 같다. FALSE

-엄마는 아빠가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는 몹시 슬퍼하셨다. 엄마는 내가 그 질문 하는 걸 싫어했다. FALSE

-내가 우유를 부으려 하고 있다. 내가 난장판을 만들어 놨다. TRUE

-아빠가 차를 몰고 출근할 때, 엄마는 늘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FALSE

-내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아빠는 주로 위층에서 일을 하셨다. 많이 화가 나신 게 아니라면 어쩌면 아빠가 나랑 퍼즐 놀이를 해주실지도 몰라. TRUE

-아빠가 뭘 드시는 거지? TRUE

-...(자살한 부친의 시신) TRUE

그리고 밝혀지는 진실.

어린 시절의 환자는 당시 바깥 마당에서 티타임 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목이 말라 집으로 들어가 우유를 마시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수로 우유를 바닥에 쏟아버렸고, 어쩔 줄 몰랐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샤워 중이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부탁하라며 그녀를 위층으로 올려보냈습니다.

그녀가 위층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던 순간, 그녀의 아버지는 총을 입에 물고 있었고 그녀를 바라본 채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보게 된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어머니는 교통사고 이야기를 꾸며내어 사건의 모든 전말을 잊게 만들었지만, 환자의 무의식 속에서는 교통사고는 거짓이며 모든 전말을 기억하고 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순간 방어기제가 사라짐과 동시에 그녀의 시선공포증은 심해져갔으며, 그로 인해 플레이어를 찾은 것이었죠.

이 이야기를 라캉의 이론을 통해 해석해 보겠습니다.

1. 교회=자살을 금지하는 곳이므로, 교회를 사랑하게 된다면 반대로 아버지를 증오할 수밖에 없어서, 아버지를 증오하는 길을 피하고자 무의식적으로 교회를 질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2. 사람들이 보는 시선은 곧 내가 나 자신을 보는 시선이요, 어릴 적 환자는 아버지의 자살(그리고 아버지의 시선)과 직면하게 되면서, 본환상이 형성되었는데 이때의 본환상이란 '아버지가 죽은 것은 나 때문이다.'라는 죄책감으로 추측이 가능합니다.

죄책감은 지속적으로 '시선'이라는 단어에 달라붙고, 시선을 연상시키는 '사람들의 시선'을 환자가 피하고 혐오하게끔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웃음* 아... 엄마는 와인을 좋아했어요. *웃음*" 이 부분 또한 라캉의 '인간은 기표의 우연성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데, 와인은 포도로 만들며, 포도주스는 와인과 아버지의 자살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단서 중의 하나로도 볼 수 있습니다.

4. 환자는 그 당시의 기억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설명에 의해 강제로 그 기억을 다른 식으로 '해석당하게' 조작된 것이며, 이는 어머니의 시선과도 상응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분노는, 당시의 진실에 대해 함구하도록 명령한 어머니의 시선에 대한 무의식적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망 감정은 어머니가 죽었으면, 그리고 어머니가 사라짐으로써 당시의 진실을 자유롭게 해석하여, 궁극적으로는 당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기억은 하지만, 그 기억의 무의식적 힘(실재계)로부터 벗어나고자 상징화하고자 하는) 환자의 근원적인 소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증상이 심해짐으로써 플레이어를 찾아온 것 또한 무의식적인 환자의 욕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디 라캉의 철학은 프랑스 철학답게 오리지날한 전문용어가 많고 이를 본 글에서 일일이 다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이론에 대한 설명은 배제하고 이렇게 비전공자들도 무리 없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서술하는 것으로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라캉은 욕망의 근원이 개인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주장했고, 그 결여로 인해 착각과 환상을 그리게 되고 그것을 염원, 소망, 혹은 몽상하는 것이 삶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을 향유라 하는데 이 향유라는 것은 착각이고 환상이기 때문에 완벽한 충족도 결여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어중간함을 극복하는 것이 라캉철학의 주된 목표요, 이를 위한 끊임없는 상황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죠.

<네버마인드> 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현대프랑스철학을 전공했지만 주전공도 아닌데다 전공수업에서도 맛뵈기로만 가르쳤던 라캉에 대한 이야기와 연관이 되었기 때문에 이번 글은 몇 번이고 쓰기를 망설일 정도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코로나가 진정이 되면 추후 다시 겨스님을 찾아뵌 후 관련된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또한 다른 에피소드에 대한 리뷰에 대해서도 꽤나 망설여지는 편입니다.

각기 다른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를 모두 같은 이론으로 명료하게 분석하는 것도 난제요, 게임 내에서의 구현된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꽤나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추후에 또 리뷰할 수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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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쳐드 / 악마를 보았다 / 방황하는 칼날- 복수극에 대한 개인적인 논평

2020.07.26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은 2010년 상영된 로버트 라이버먼의 영화 <토처드>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복수를 걸심하고, 살인범을 직접 잡아 모진 고문을 가하는 흔하다면 흔한 소재의 복수극 영화죠.

오늘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복수극 영화를 주제로 게시글을 써내려가겠지만 일단 이 작품으로 이번 글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수심은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으로 보면 복수심은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생물에 대해 공격적인 감정을 품게 하는 유전자의 명령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자신이 되려 피해를 입을까 다른 동물들을 함부로 공격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생존율이 올라갔기 때문이죠.

문명과 사회가 갓 탄생했을 때에는 법이 개개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과 주변인물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복수는 미덕이요,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 멸시받는 경우가 보통이었습니다.

특히 체면과 의리를 미덕으로 여기는 세력들은 대체로 복수를 당연시했고, 종교적 성향이나 문화가 강한 세력들은 주로 복수보다 관용을 중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 집단, 인간 사회가 체계화되면서 크고 작은 복수가 늘어나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 폐해가 너무 커, 근대법체계가 정립되고 복수를 통한 자력구제(自力救濟) 금지가 근간이 되면서, 차츰 법률을 통한 제도권적 해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법률이 강화되고 신분의 형평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존심이나 영광에 집착하기 보단 사회와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엔 보통 집단 따돌림이나 성폭행의 문제를 겪고도 아무 말도 항의도 못 하고 당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사회나 선생님, 가족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아예 참기만 해서 생기는 문제가 더 많아지는 편이죠.

이렇듯이 법이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이 계속 지속되다면, 복수가 신성시되던 과거의 인식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복수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은 이의 양면성을 모두 드러내고 있으며, 가해자가 되어버린 피해자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최후에는 복수를 끝내고 난 복수자의 쾌감이나 이후의 공허감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기도 하고, 복수라는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거나 법률의 벽에 가로막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를 오늘 소개하는 영화 <토처드>애서는 이렇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사 크레이그와 부동산 중개업자 엘리스 부부는 아들 벤자민을 둔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앞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아들이 갑자기 갑자기 집에 쳐들어온 납치범에게 납치를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죠.

 

 

 

 

 

 

갑작스러운 유괴 사건에 가족은 빠르게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이미 한 발 늦은 후였습니다.

 

유괴범은 우울증에 정신질환까지 앓고 있는 사이코패스였으며, 납치당한 벤자민이 살려달라고 빌자, 그는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만으로 벤자민을 목 졸라 살해하죠.


 

 

우여곡절 끝에 유괴범은 검거되었고 교도소로 이송되기 시작하지만, 부부는 법원이 내린 판결만으로는 유괴범이 치를 충분한 대가가 되지 않는다며,

 

직접 그 유괴범을 잡아다 복수할 계획을 꾸밉니다.

 

그리고 우연히 범인을 호송하던 차량이 도로에서 순록과 맞닥뜨려 전복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호송 차량을 미행하던 부부는 차량에서 유괴범을 빼내어 그들이 고문실로 손수 개조한 집으로 끌고 옵니다.

 

 

 

 

그리고 의사인 남편 크레이그의 통제 하에, 유괴범은 쉽게 죽지도 못한 채 부부에게 갖은 고문을 받게 됩니다.


 

모진 고문이 계속되자, 유괴범은 차차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지만, 부부는 이를 거짓말이라 여기며 더더욱 잔혹한 고문을 감행하게 되죠.

 

결국 유괴범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부부의 집에서 탈출하고, 자기 자신이 그들의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에 용서를 비는 사과문을 남기고 집 근처의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부가 잡아온 유괴범은 사실 다른 범죄자였습니다.

 

전복사고가 일어났던 호송 차량에는 벤자민의 유괴범 뿐만 아니라 금융사기 혐의로 구속된 또 다른 범죄자가 타고 있었고, 진범은 이미 차량에서 탈출한 후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스와 크레이그는 차량에 남겨진 또 다른 범인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행했고, 그는 끝내 정신이 망가져 결국 자신이 그들의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했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만 것이었죠.


 

그리고 탈출한 진범은 출동한 경찰에게 다시 잡혀 버렸으며, 애먼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만 부부는 결국 집을 떠나 행방이 묘연해지며 이야기는 찝찝하게 끝납니다.

 

<토처드>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하다시피, 복수극 이야기는 보통 가해자가 되어버린 피해자, 최후에는 복수를 끝내고 난 복수자의 쾌감이나 이후의 공허감, 복수라는 행동이 잘못되었음이나, 법률의 벽에 가로막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본 영화는 이를 제 3의 인물을 대입하여 반전을 선사하면서, 복수에 대한 인식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복수극 소재의 작품 중에서 리뷰 대상으로 뽑았던 것 같습니다.

 

같은 시기에 나온 또 다른 영화 <악마를 보았다> 로 넘어가 봅시다.

약혼녀를 죽인 살인범 장경철(최민식)을 끝내 잔인하게 죽여 복수를 끝내는 데 성공한 김수현(이병헌)은 최고의 복수를 하고 약혼녀의 원수를 갚았다는 후련함의 폭소와, 복수를 위해 모든것을 잃고 결국 자신 또한 악마가 되어버렸다는 광소가 뒤섞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남긴채 비틀거리며 새벽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끝으로 영화가 끝나죠.

마치 니체가 <선악의 저편> 에서 언급한 심연과도 비슷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복수에 대해 이런 경각심을 가져야 되는 말만을 남기지만은 않았습니다.

"만약 원수가 명예를 훼손했다면, 복수로 그것을 복구할 수 있다. ... 또한 복수는 내가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거기서 비로소 합의와 조정이 의미를 가진다."

라고 말하기도 했죠.



 

이번에는 그로부터 4년 후의 영화 <방황하는 칼날>을 살펴 보겠습니다.

주인공이자, 질 나쁜 고등학생 무리에게 강간과 죽임을 당한 딸의 아빠 이상현(정재영)은 결국 가해자와 가담자들을 하나하나 척살해 나가지만 결국 경찰에게 사살당함으로서 제지당합니다.

그리고 담당 형사는 이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기지 않게 할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제 3자들이 복수에 대해 비난을 하는 주된 근거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견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복수심의 원인과 배경을 본다면 이것이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난감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 것이 현실사회이기도 합니다.

법에 의한 해결이라는 합법적인 복수도 결국은 완벽하지 않으며 법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을 뿐더러, 현존하는 법들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며 법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바뀝니다. 심지어 헌법조차도 바뀔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원칙적인 반응을 되풀이하는 것은 사건을 해결하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도 못합니다.

복수의 연쇄 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복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니 개인에게 절대로 복수하지 말고 법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주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사회적으로도 복수가 전혀, 절대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가도 사실 의문의 여지를 남기기도 하죠.


 

복수를 하려면 관짝을 두 개 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아끼려면 관짝을 더 많이 짜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 중 하나는 자기 것이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제 의견으로 이번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겪는다면, 훗날 제 자식들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다 다진 고기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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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헌트 시리즈 - 미디어 내에서 허용되는 표현의 자유와 그 범위에 대한 고찰


2020.07.07

이번에 소개해 드릴 작품은 GTA시리즈를 개발한 회사로도 유명한 락스타 게임즈 사의 작품 <맨헌트> 시리즈입니다.

본래 맨헌트란 단어는 위험한 지명수배자나 범죄자를 추적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고, 시민의 제보를 받는 등 포위망을 좁히는 활동을 총칭하는 경찰 용어지만, 본 작품에서는 이를 직역하여 인간 사냥이라는 의미로 내세워, 철저히 폭력성과 잔인함, 그리고 범죄에만 초점을 둔 게임임을 강조한 것이 특징입니다.





제작사는 GTA 시리즈가 발매를 시작할 때부터 현재까지도, 게임 내의 폭력성과 범죄를 동반한 컨텐츠들로 인해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었고,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락스타의 사장 샘 하우저(1971~현재)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게임 내에서의 폭력성과 범죄, 잔인성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2003년, 맨헌트 시리즈의 첫 작품인 <맨헌트>가 탄생하였습니다.

물론 언론과 게이머들의 비판과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고 오락소프트웨어등급 위원회(ESRB : Entertainmemts Software Ratimg Board) 에서도 오직 그 폭력성만으로 일반적인 포르노와 같은 취급을 받는 심의거부/청소년 이용불가에 해당하는 AO(Adults Only)등급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2019년 기준으로 폭력성으로 인해 AO등급을 받은 게임은 3개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우저는 이에 질세라 2007년, 맨헌트 시리즈의 후속작인 <맨헌트2>를 보란듯이 내놓습니다.

그리고 발매 직후 논란이 더더욱 커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죠.
 

 

게임이 폭력적이면 대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을까 궁금해하시는 독자 여러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쇄살인마이자 4급 수배범인 <맨헌트> 의 주인공 제임스 얼 캐시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약물주사형에 처해지지만, 모종의 이유로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포르노 업계의 대부인 리오넬 스타크웨더가 그를 거두었으며, 스타크웨더는 캐시를 살려 준 것을 내세워 캐시에게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바로 자신이 매수한 도시 내에서 스너프 필름 (자살이나 살인을 촬영한 영상) 을 제작하기 위해, 도시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라는 것이었죠.

캐시는 스타크웨더의 음모를 파헤치며 도시의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죽이다, 결국 자신 역시 이용당해 죽을 위기에 처하자, 결국 스타크웨더까지 죽이고 도시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행방이 묘연해지며 이야기는 끝나죠.

 

게임 내에서는 실제 사람을 묘사한 캐릭터들이 서로를 잔인하게 해치는 모습이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2003년 작품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직접 다가오는 잔혹성이 높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모션이나 사운드 등의 연출만큼은 절대로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있을 법한 모습으로 세밀하게 연출하고 있죠.

둔기로 사람 머리를 산산조각내는 것은 물론이고, 비닐봉투를 사람 머리에 씌워 질식사를 시키거나, 정육점 고기칼로 사람 목을 썰어 분리하기도 합니다.

 

후속작인 <맨헌트2> 에서는 자각이나 기억이 없는 완벽한 인간 병기를 만들기 위해 서로를 의식하지 못하는 이중인격을 만드는 실험 <피크맨 프로젝트>가 실시됩니다.

그 연구원 중 하나이자 주인공인 다니엘 램 박사(좌)는, 자신의 몸에 살인마의 인격 "레오 캐스퍼(우)" 를 이식하는 데 성공했으나, 실험은 실패하여 다니엘과 레오는 서로를 의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다니엘의 몸에 깃든 레오의 인격은 통제할 수 없었고, 레오는 실험과 관련된 모든 이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몸을 차지하려 하죠.

플레이어는 다니엘이 되어 레오에게 맞서서 다니엘 램으로 남을 것인지, 혹은 레오에게 패배하여 살인마 레오로서 각성할지 선택하게 됩니다.

 

맨헌트2는 2003년에서 2007년으로 넘어간 만큼 그래픽의 품질도 조금 올라간 데다 전작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은 잔혹한 연출을 보여줍니다.

전작의 연출을 대부분 계승하는 것은 물론이요, 더더욱 잔인한 연출이 추가되기까지 했습니다.

면도칼로 사람 몸에 마구잡이로 시뻘건 줄을 긋고, 플라이어로 사람의 뒷목 생살을 잡아뜯기도 하며, 심지어는 정원용 가위를 등에 찔러넣어 척추를 끊어버리기까지 하죠.
 

 







맨헌트 시리즈는 심각한 유혈과 신체훼손, 폭력, 게임 내의 거친 욕설. 그리고 2에서는 이에 인체실험과 마약, 성적인 묘사까지 제한적으로 추가되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수입이 금지되기까지 했으며, 하드코어한 게임을 즐기던 게이머들마져 이런 작품을 왜 내놓았냐며 비판할 정도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락스타는 이를 되받아 치기라도 하듯, 2019년 연말에 새 시리즈인 <맨헌트3>의 트레일러 영상을 내놓기까지 했습니다.

해당 시리즈에 대한 영상과 발매 여부는 끝내 루머로 밝혀졌으나, 이마저도 논란의 여지를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제아무리 청소년 이용불가라 해도 플레이어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위 때문에 플레이어들과 언론에서 적잖이 화제가 된 것이 그 이유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장르나 수위의 조절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미디어 컨텐츠의 표현력을 올리고 작품성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 극단적인 소재의 작품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 역시 듭니다.

미디어 컨텐츠들에 대한 검열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현실이지만,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며, 그 기준 역시 또 다른 희대의 난제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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