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5 질의응답 스크립트

 

 에반게리온 학술제 스피치 이후 카카오톡 아이디로 연락을 걸어온 익명의 질문자와의 대화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Q. 질문자 
A. 작성자 
로 읽을것. 

Q.간단히 설명하자면 욕구(의지, 목적)를 가지고, 경험을 통해 욕구를 해결할 방법을 고안하고 개선해 욕구를 충족시키는 그런 로봇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도가 아니라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스피치를 주제로 대화하며 사고의 폭을 넓히고 싶다. 

A. 인문학도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도와주겠다. 우선 내용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가? 

Q. 내용에서 크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없으나 질문이 있다.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타자라는 개념을 알고, 타자를 인식할수 있어야 함. 그렇다면어떤 대상이 자신과 같이 의지를 가진 존재. 즉 '타자'임은 어떻게 알 수 있는걸까? 

A. 질문부터 시작해 보겠다. 스피치를 잘 이해했다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Q.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는 존재가 존재함은 부정할수 없다. 생각하는 존재가 나라면 나는 존재하는것이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A.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생각하는 존재가 존재한다.' 와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내가' 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데카르트는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았으나, 의심을 하고 잇는 자기 자신이 존재함은 끝내 의심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왜 이 말이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 라고 해석되는 이유이다. 

Q. 의심을 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것은 어떻게 논증될 수 있는가? 

A. 모든 것을 의심해 본다고 치자. 2+2=4라고는 하지만 어디서 악마가 2+2는 무조건 4다 라고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해도 내가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 의심스럽다면 
이것은 모든 것이 진실이거나, 의심을 하고 있는 내가 실제로 존재하거나, 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진실이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는 불가능에 가갑다. 

Q. 위에서 말한대로, 악마가 존재해서 나에게 어떤것을 의심하게 하는 가능성은 부정되지 못하는것 아닌가? 

A. 악마는 그저 가설일 뿐이다. 악마가 의심하게 하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 아니라, 악마가 있는지의 여부부터 의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Q. 그렇다면 '의심의 발현은 어떤 처리장치를 거친것이므로 처리장치는 존재한다.' 로 해석될 수 있는가? 

A. 어떤 의미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Q. 그렇다면 의심의 주체는 왜 '나'일 수밖에 없는가? 

A.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의심 역시 할 수 없다. 

Q. 자기 자신이 존재하므로, 현재까지 발현된 모든 의심이 내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것은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가? 

A. 의심을 하는 이유는 의심할 수 없는 것(진리)를 찾기 위함이다. 또한 의심이라는 단어에 크게 중점을 둘 필요도 없다. 의심은 진리를 찾기 위한 생각의 방식에 불과하며, 모든 의심이 내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타인의 의심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Q. 납득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A. 지금까지 데카르트의 존재론이었다. 그렇다면 본인이 에바와 연관을 지었던 철학자인 레비나스의 이론으로 넘어가 보겠다. 질문이 있는가? 

Q. 레비나스의 이론은 타인이 존재함으로써 나와 외부를 분리할수 있으며 내 위상을 가늠할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가? 

A. 그 해석은 틀렸다. 타인이 존재함으로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분리하는 것은 맞으나, 그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가늠할 수는 없다. 

Q. 위상의 측정은 비교대상이 있어야 가능하고, 나를 제외한것은 타인이니까 비교대상은 타인밖에 없지 않나? 

A. 공중도덕을 예로 설명해 보겠다. 노약자석에 당신이 앉아 있는데 앞에 노인이 서 있다면 어쩌겠는가? 

Q. 당연히 자리를 양보한다. 

A. 그럼 왜 자리를 양보하는지 두 가지 항목 중 선택해라. 
1. 노인을 노약자석에 앉게 하기 위함이다. 
2. 노인을 앉힘으로서 공중도덕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Q. 2번을 선택하겠다. 

A. 이 선택지의 의도는 타인의 존재를 어떻게 인정하느냐를 구분하는 것이다. 1번 항목은 단순히 타인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이나, 2번 항목은 자신을 공중도덕을 지키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타인을 인정했기 때문에,1번은 레비나스의 이론에 좀더 가깝지만 2번은 레비나스의 이론과 반대된다. 

Q. 순수한 선악이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A. 선악과는 관계가 없다. 이것을 설명하는 이유는 레비나스의 이론이, 타인을 어떠한 수단으로도 간섭하거나 제압할 수 없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노약자석에 노인이 앉는것은 '노인' 이라는 성질을 가진 타인의 권리이며, 우리가 노약자석에 앉았다면 우리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된다. 
그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리를 양보해야 햐며, 어떤 이유에서 자리를 양보했는지의 여부가 자신과 타인 중 어느 쪽을 우선시하는지를 결정한다.

Q. 그렇다면, 타인에 대해 간섭할 능력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에 대해서 간섭할 능력이 있으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A. 후자이다. 

Q. 레비나스의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에바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A. 스피치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다시 한번 설명해 주겠다. 레비나스의 이론은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과 흡사한 면모를 가진다. 

인류보완계획은 자신과 타인의 경계선 (AT필드)를 완전히 허물어, 모든 생명을 하나의 유기체(LCL)로 통합하는 계획이다. 이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바로 거대한 자기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에서는 이를 '어디까지나 자신이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은 없는 세계.' 라고 칭한다. 

Q. 그렇다면 인류보완계획은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 레비나스의 이론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A. 그렇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에서는 이를 레비나스의 이론과 비슷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신지이다. 

신지는 서드 임팩트 이후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할지의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타인이 곧 공포라는 결론을 내린 후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했으나, 그것이 곧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를 중단했다. 불완전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인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인류의 불완전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이 타인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레비나스의 이론과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Q.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해석했다. 

에바에서 신지의 선택은 타인과의 관계는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나, 고통의 총량보다 쾌락의 총량이 크니 타인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의 결과. 

A. 공리주의적인 입장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이론과는 다른 관점이다. 레비나스는 공리주의와 연관된 이론이 전혀 없다. 

Q. 알고 싶은 걸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의문점을 해결할 다리가 생긴 것 같다. 혹시 관련된 키워드를 더 알려줄 수 있는가? 

A.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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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쳐드 / 악마를 보았다 / 방황하는 칼날- 복수극에 대한 개인적인 논평

2020.07.26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은 2010년 상영된 로버트 라이버먼의 영화 <토처드>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복수를 걸심하고, 살인범을 직접 잡아 모진 고문을 가하는 흔하다면 흔한 소재의 복수극 영화죠.

오늘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복수극 영화를 주제로 게시글을 써내려가겠지만 일단 이 작품으로 이번 글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수심은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으로 보면 복수심은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생물에 대해 공격적인 감정을 품게 하는 유전자의 명령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자신이 되려 피해를 입을까 다른 동물들을 함부로 공격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생존율이 올라갔기 때문이죠.

문명과 사회가 갓 탄생했을 때에는 법이 개개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과 주변인물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복수는 미덕이요,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 멸시받는 경우가 보통이었습니다.

특히 체면과 의리를 미덕으로 여기는 세력들은 대체로 복수를 당연시했고, 종교적 성향이나 문화가 강한 세력들은 주로 복수보다 관용을 중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 집단, 인간 사회가 체계화되면서 크고 작은 복수가 늘어나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 폐해가 너무 커, 근대법체계가 정립되고 복수를 통한 자력구제(自力救濟) 금지가 근간이 되면서, 차츰 법률을 통한 제도권적 해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법률이 강화되고 신분의 형평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존심이나 영광에 집착하기 보단 사회와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엔 보통 집단 따돌림이나 성폭행의 문제를 겪고도 아무 말도 항의도 못 하고 당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사회나 선생님, 가족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아예 참기만 해서 생기는 문제가 더 많아지는 편이죠.

이렇듯이 법이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이 계속 지속되다면, 복수가 신성시되던 과거의 인식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복수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은 이의 양면성을 모두 드러내고 있으며, 가해자가 되어버린 피해자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최후에는 복수를 끝내고 난 복수자의 쾌감이나 이후의 공허감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기도 하고, 복수라는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거나 법률의 벽에 가로막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를 오늘 소개하는 영화 <토처드>애서는 이렇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사 크레이그와 부동산 중개업자 엘리스 부부는 아들 벤자민을 둔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앞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아들이 갑자기 갑자기 집에 쳐들어온 납치범에게 납치를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죠.

 

 

 

 

 

 

갑작스러운 유괴 사건에 가족은 빠르게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이미 한 발 늦은 후였습니다.

 

유괴범은 우울증에 정신질환까지 앓고 있는 사이코패스였으며, 납치당한 벤자민이 살려달라고 빌자, 그는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만으로 벤자민을 목 졸라 살해하죠.


 

 

우여곡절 끝에 유괴범은 검거되었고 교도소로 이송되기 시작하지만, 부부는 법원이 내린 판결만으로는 유괴범이 치를 충분한 대가가 되지 않는다며,

 

직접 그 유괴범을 잡아다 복수할 계획을 꾸밉니다.

 

그리고 우연히 범인을 호송하던 차량이 도로에서 순록과 맞닥뜨려 전복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호송 차량을 미행하던 부부는 차량에서 유괴범을 빼내어 그들이 고문실로 손수 개조한 집으로 끌고 옵니다.

 

 

 

 

그리고 의사인 남편 크레이그의 통제 하에, 유괴범은 쉽게 죽지도 못한 채 부부에게 갖은 고문을 받게 됩니다.


 

모진 고문이 계속되자, 유괴범은 차차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지만, 부부는 이를 거짓말이라 여기며 더더욱 잔혹한 고문을 감행하게 되죠.

 

결국 유괴범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부부의 집에서 탈출하고, 자기 자신이 그들의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에 용서를 비는 사과문을 남기고 집 근처의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부가 잡아온 유괴범은 사실 다른 범죄자였습니다.

 

전복사고가 일어났던 호송 차량에는 벤자민의 유괴범 뿐만 아니라 금융사기 혐의로 구속된 또 다른 범죄자가 타고 있었고, 진범은 이미 차량에서 탈출한 후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스와 크레이그는 차량에 남겨진 또 다른 범인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행했고, 그는 끝내 정신이 망가져 결국 자신이 그들의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했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만 것이었죠.


 

그리고 탈출한 진범은 출동한 경찰에게 다시 잡혀 버렸으며, 애먼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만 부부는 결국 집을 떠나 행방이 묘연해지며 이야기는 찝찝하게 끝납니다.

 

<토처드>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하다시피, 복수극 이야기는 보통 가해자가 되어버린 피해자, 최후에는 복수를 끝내고 난 복수자의 쾌감이나 이후의 공허감, 복수라는 행동이 잘못되었음이나, 법률의 벽에 가로막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본 영화는 이를 제 3의 인물을 대입하여 반전을 선사하면서, 복수에 대한 인식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복수극 소재의 작품 중에서 리뷰 대상으로 뽑았던 것 같습니다.

 

같은 시기에 나온 또 다른 영화 <악마를 보았다> 로 넘어가 봅시다.

약혼녀를 죽인 살인범 장경철(최민식)을 끝내 잔인하게 죽여 복수를 끝내는 데 성공한 김수현(이병헌)은 최고의 복수를 하고 약혼녀의 원수를 갚았다는 후련함의 폭소와, 복수를 위해 모든것을 잃고 결국 자신 또한 악마가 되어버렸다는 광소가 뒤섞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남긴채 비틀거리며 새벽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끝으로 영화가 끝나죠.

마치 니체가 <선악의 저편> 에서 언급한 심연과도 비슷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복수에 대해 이런 경각심을 가져야 되는 말만을 남기지만은 않았습니다.

"만약 원수가 명예를 훼손했다면, 복수로 그것을 복구할 수 있다. ... 또한 복수는 내가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거기서 비로소 합의와 조정이 의미를 가진다."

라고 말하기도 했죠.



 

이번에는 그로부터 4년 후의 영화 <방황하는 칼날>을 살펴 보겠습니다.

주인공이자, 질 나쁜 고등학생 무리에게 강간과 죽임을 당한 딸의 아빠 이상현(정재영)은 결국 가해자와 가담자들을 하나하나 척살해 나가지만 결국 경찰에게 사살당함으로서 제지당합니다.

그리고 담당 형사는 이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기지 않게 할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제 3자들이 복수에 대해 비난을 하는 주된 근거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견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복수심의 원인과 배경을 본다면 이것이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난감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 것이 현실사회이기도 합니다.

법에 의한 해결이라는 합법적인 복수도 결국은 완벽하지 않으며 법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을 뿐더러, 현존하는 법들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며 법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바뀝니다. 심지어 헌법조차도 바뀔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원칙적인 반응을 되풀이하는 것은 사건을 해결하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도 못합니다.

복수의 연쇄 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복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니 개인에게 절대로 복수하지 말고 법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주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사회적으로도 복수가 전혀, 절대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가도 사실 의문의 여지를 남기기도 하죠.


 

복수를 하려면 관짝을 두 개 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아끼려면 관짝을 더 많이 짜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 중 하나는 자기 것이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제 의견으로 이번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겪는다면, 훗날 제 자식들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다 다진 고기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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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스크(TUSK) - 인간의 모습과 인간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

 

2019. 11. 16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은 2014년 개봉된 케빈 스미스 감독의 영화 <터스크>입니다.

인간 바다코끼리라는 소재를 다룬 저예산 영화로, 괴상망칙한 영화로는 그 악명 높은 <인간지네> 시리즈에 버금가는 수준을 자랑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 리뷰에서는 혐오스럽고 잔인한 장면이 많이 보여질 예정이니, 글을 읽을 때 각별히 주의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세계의 핫한 동영상을 보고 그 주인공들을 취재하며 라디오로 전파하고 다니는 팟캐스터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 왈라스(위)와 테디(아래)는 방송 도중 엽기적인 동영상을 발견합니다.


 

바로 칼부림을 하며 놀다 실수로 자신의 다리를 자른 남자를 보여주는 동영상이었죠. 그들은 이런 그를 방송으로 조롱했으며, 그 중에서도 왈라스는 그를 직접 취재해 보고 싶다며, 여자친구 알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로 떠납니다.

 

 

여자친구의 연락은 뒷전으로 미루고 취재를 위해 달려왔지만...

 

영샹의 주인공은 주위의 조롱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살한 후였죠.

 

 

끝내 아무런 특종도 건지지 못한 왈라스는 돌아가려 했지만, 우연히 들른 술집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도중 기이한 내용의 쪽지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는 내용과 그 주인공이 사는 곳이었죠.
결국 왈라스는 그곳으로 곧바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집

 

 

쪽지의 주인공은 하워드라는 이름의 노인이었습니다.

 

 

왈라스에게 차를 대접하며 하워드는 젊은 시절, 자신이 항해 중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으나, 어떤 바다코끼리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살아났으며 그 바다코끼리에게 "터스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사실에 놀란 왈라스는 이를 취재하려 했지만...

 

하워드가 미리 차에 타놓은 수면제로 인해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죠.


 

다음 날, 깨어난 왈라스는 자신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다리에 감각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워드는 갑자기 독거미가 나타나 왈라스의 발을 물었고, 그를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고 설명해주는데, 바로 그것은...

 

다리 절단이었죠.

 

사실 거미가 나타난 것도 거짓말이었지만, 바다코끼리와의 드라마틱한 인연도 반은 거짓말이었습니다.

하워드는 그저 표류 도중 바다코끼리 터스크의 의해 구조되긴 했지만, 이후 살기 위해서 그 터스크를 잡아먹었던 것이었죠.


 

그리고 그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살기 위해 터스크를 잡아먹은 것에 죄책감을 느꼈던 하워드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그들을 이용해 새로운 인간 바다코끼리 "터스크"를 만들어 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터스크에게 죽음을 맞기를 바라고 있었죠.

 

왈라스는 이에 기겁하여 동료 테디와 여자친구 알리에게 경찰에 신고해달라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왈라스가 한 발 늦은 후였습니다.

하워드는 결국 왈라스를 기절시킨 후 그를 인간 바다코끼리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하워드의 집에는 잔잔한 바다 풍경이 연출되는 영상과 함께 괴상한 울부짖음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터스크가 완성되었습니다.

 

하워드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 바다코끼리 왈라스, 아니 터스크와 함께 생활하고, 수영을 하며 놀고, 바다코끼리의 주식인 고등어까지 먹이로 주며 왈라스를 진짜 바다코끼리처럼 만들려 하기 시작합니다.


 

하워드가 던져준 고등어를 맛있게 먹기 시작하는 터스크의 모습


 

마지막으로, 하워드는 새로이 탄생한 터스크의 생존 본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이전 희생양들의 거죽과 뼈로 만든 바다코끼리 옷을 뒤집어쓰고, 터스크와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계속 훈련을 받은 터스크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죠.


 

결국 하워드는 바다코끼리 옷을 찢고 나와 인간의 모습으로서 터스크를 죽이려 들었지만,

 

터스크는 바다코끼리의 엄니로 하워드를 난도질하여 스펀지처럼 만들어 죽여 버리는데 성공하죠.

 

그렇게 하워드는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피 맛을 본 터스크는 결국 왈라스였던 인간 시절의 기억을 모두 잊은 채 이성을 잃어버리고, 진짜 바다코끼리 "터스크"로 각성해 버리고 맙니다.


 

 

뒤늦게 알리와 테디가 왈라스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은 후였죠.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났습니다.

터스크는 유기, 혹은 기부된 동물들로 이루어진 왜래의 동물농장에 맡겨져 살고 있었고, 알리와 테디는 터스크를 보기 의해 찾아옵니다.

 

터스크의 새 집

 

그를 보기 위해 알리가 고등어를 던져 줍니다.

 

 

이제 바다코끼리가 다 됐으니 능숙하게 맛있는 내장 부분부터 바로 먹어치우는 터스크의 모습.

 

 

알리는 변해버린 남자친구의 모습에 슬퍼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외치고, 이에 반응이라도 하듯 생각에 잠기는 터스크의 모습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영화 <터스크> 에 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해 보기에는 그 주제가 상당히 얕은 듯한 느낌이 적잖이 들었습니다만, 영화 자체의 요상한 내용이 리뷰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팟캐스터가 되어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며 살던 주인공 왈라스의 행적과, 하워드라는 미치광이에 의해 인간 바다코끼리가 되고 마는 끔찍한 말로가 비교되어 인간성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생각해 볼 건, 인간이 인간의 형상을 잃었을 때,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미약하게나마 영화에서 보여 주고 있지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라는 말은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성 사이의 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왈라스가 다리를 잃고 절망하고, 끝내 하워드에게 신체개조를 받으며, 결국 인간 바다코끼리가 되었을 때 그 정신이 망가지는 과정을 영화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왈라스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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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라이스(Splice) - 새로이 창조된 인조 생명체의 아름다움과 그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댄 대가에 대한 고찰

 

2019.11.03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은 영화 <큐브>의 감독으로 유명한 빈센초 나탈리 감독의 SF 스릴러 영화 <스플라이스>입니다.

유전자 조작과 이를 통해 탄생한 새로운 인조 생명체를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과 잔혹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SF 장르에서는 드문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단어 Splice는 밧줄이나 비디오 테이프의 필름 등을 이어 붙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다종(多種)의 생명체가 가진 유전자를 모두 융합시킨 생명체가 탄생하는 이야기를 다룬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존하지 않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금단의 과학 기술과 이로 인한 참혹한 대가를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포스터에서는 이를 "무섭도록 아름답다"는 표현과 함께 미화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표현이 사용됐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내용을 설명해 보도록 하죠.


 

영화는 수술복을 입은 사람들을 비추면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전도유망한 과학자 부부 클라이브(좌)와 엘사(우)로, 이들은 제약회사에 납품할 신약을 만늘어 내기 위해 조류, 양서류, 갑각류, 파충류 등 여러 종류의 동물들의 유전자를 결합하여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백질을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구 끝에 이를 생산할 수 있는 정체불명의 인조 생명체들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죠.

 

새로이 탄생한 인조 생명체의 모습

 

두 사람을 이렇게 태어난 두 생물을 프레드와 진저라 이름짓고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두 생물을 만들어낸 이유는 암수별로 다른 유전자 조합 때문이었겠지요.

 

 

그 과정에서 두 생물이 혓바닥(?)처럼 생긴 기관을 이용해 서로 교감하는 모습도 보여주죠.

 

그들의 연구는 성공리에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아직 난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새로이 만든 유전자를 인간의 유전자와 결합하는 것이었죠.

인간의 유전자는 타 동물들보다 훨씬 복잡한 유전자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부부는 이에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끝내 부부에게 금지된 호기심을 심어 주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죠.

 

부인 엘사는 제약회사들을 깜짝 놀래켜 주기 위해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인간의 유전자를 합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보기로 합니다.

그나마 엘사보다는 조금 더 윤리적이었던 남편 클라이브는 이를 만류했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엘사의 실험에 동참하게 되죠.

 

결국 전도유망한 과학자 부부 사이에서 금지된 실험이 시작되고,

 

 

인간도 동물도 아닌 무언가가 태어납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정체불명의 생물

 

놀랐는지 실험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듭니다.

 

 

클라이브는 실험실을 밀폐시키고 가스를 틀어 생물을 죽이려 들었지만, 이를 좀더 연구해 보자는 엘사의 제안에 결국 마취 가스를 틀어 생물을 재운 후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다종(多種)의 유전자를 합쳐서 탄생한 그것은 보통 동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장 속도를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유전자가 합쳐진 만큼 어린아이 수준의 지성까지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엘사의 옷에 새겨진 단어 NERD까지 알파벳을 조합하여 따라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죠.


 

그리고 너드라는 단어를 거꾸로 보았을 때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엘사는, 그 생물에게 드렌(Dren)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러나 며칠 후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죠.
실험실에서 같이 일하던 클라이브의 동생 개빈이 걸어잠근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알고 싶어 실험실에 들어섭니다.

 

드렌의 꼬리가 보이고...

 

외부인이라 가차없이 공격당합니다.

 

다행히 부부의 저지로 개빈은 무사했죠.

하지만 이로 인래 드렌의 존재가 처음으로 외부에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형이나 형수보단 윤리의식이 강해 보이는군요.

 

드렌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빌까 두려웠던 클라이브는 드렌을 물에 넣어 익사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드렌을 만들 때 양서류의 유전자가 사용된 탓에, 양서류의 폐가 각성하여 드렌이 수중 호흡까지 해낸 탓이었죠.

결국 부부는 자신들의 본 연구를 계속하면서 비밀리에 드렌을 계속 키우기로 합니다.

 

어느덧 시간은 계속 흘러 부부는 그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합니다

 

 

 

 

 

 

다시 한 번 교감을 시도하려는 프레드와 진저

 

그러나 그것은 교감이 아니었습니다.

 

둘은 서로 피 튀기는 싸움을 시작하죠

 

피가 튀고

 

연구실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싸움의 원인은 그들이 창조해낸 인조 생명체들이 주기적으로 성별을 바꾸게 되는 특징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고, 동성이 된 프레드와 진저는 생식 본능에 이끌려 동성인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웠던 것입니다.

 

 

이를 캐치하지 못한 탓에 그들은 제약회사의 갈굼을 피하지 못하게 되고, 그들의 실험은 원점으로 돌아가죠.


 

 

 

결국 이들에게 남은 희망은 드렌뿐이었고, 드렌은 외부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실험체였던 탓에 부부는 드렌을 키울 수 있는 장소로 연구 거처를 옮깁니다.

 

 

새로운 연구 거처는 엘사의 부모님들이 살던 농가.


 

 

드렌도 많이 컸습니다.

 

 

 

알파벳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드렌.
외부에 노출이 되면 안 되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겠죠. 분명 나가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안 되죠.
결국 드렌이 난동을 피우기 시작하고 엘사와 드렌의 관계도 점점 틀어집니다.

 

결국 화가 난 드렌은 지붕을 통해 나가 버리죠.

 

그 찰나 발을 헛디딘 드렌이 지붕에서 떨어지나 싶더니

 

내제되어 있던 조류의 유전자를 이용해 날개를 만들어 떨어지지 않고 날아오릅니다.

 

 

결국 클라이브가 드렌을 설득하고

 

 

드렌은 다시 고분고분해집니다.
왜 클라이브의 말은 듣고 엘사의 말은 안 듣는 걸까요..?

 

 

결국 드렌은 나가고 싶은 욕구를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대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드렌이 그린 그림에는 클라이브 뿐이었죠.

 

 

자기 그림은 없냐는 엘사의 물음에 드렌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드렌에게 춤을 가르치는 클라이브

 

즐거워하는 드렌의 모습

 

거기서 클라이브는 드렌에게서 익숙한 분위기를 느낍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엘사가 드렌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난자를 썼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엘사는 자신의 유전자로 만든 드렌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고양이를 기르라고 선물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지만, 드렌은 그 고양이마저 꼬리로 찔러 죽여버리곤, 엘사를 위협합니다.

바로 드렌이 "암컷"이었으며, 생식 본능에 이끌려 여자인 엘사를 경쟁 상대로 보았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엘사는 드렌을 묶어 놓고 꼬리를 잘라 연구 성과로 제출합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클라이브는 드렌을 보러 왔고 둘은 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성관계까지 하고 말죠.

엘사는 이를 목격하게 되고 부부싸움을 하게 되지만, 연구 성과로 재츌한 드렌의 꼬리가 프레드와 진저보다 훨씬 안정적인 샘플임을 알게 되자 결국 필요한 것은 얻었으니, 드렌을 죽이자는 것에 암묵적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성장속도가 너무 빨랐던 드렌은 결국 예상보다 일찍 죽음을 맞았고, 부부는 드렌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드렌의 유품 중에서 그림이 발견되는데, 클라이브의 그림은 온데간데없고 엘사의 그림만이 가득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제약회사에 제출된 연구 성과의 샘플(드렌의 꼬리)에서 인간의 유전자가 검출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연구소장은 드렌의 존재를 눈치챘고,
결국 그는 개빈과 함께 부부를 찾아와 드렌의 행방을 부부에게 묻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드렌은 이미 죽은 후였죠.

 

그러나 드렌이 묻힌 자리에 시체는 온데간데없었고 드렌은 다시 살아나 있었습니다.

 

성별을 주기적으로 바꾸는 프레드와 진저처럼, 이번엔 수컷이 된 채로요.

수컷으로 부활한 드렌은 다시 그 본능에 이끌려, 이번엔 수컷들을 경쟁 상대로 보고 죽이기 시작합니다.

결국 개빈과 제약회사의 연구소장이 드렌에게 끔찍한 죽음을 맞죠.

 

 

드렌은 클라이브마저 반죽음상태로 만든 후 엘사를 잡아 옷을 찢고 강간합니다.

오직 본능에 따라서 말이죠.

 

하지만 클라이브가 마지막 힘을 짜내 드렌과 동귀어진하고, 결국 이 참극에서 살아남은 건 엘사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조 생명체 사건은 종결되나 싶었지만, 제약회사에서 엘사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드렌에게 강간당한 엘사가, 드렌의 아이를 임신하고 만 것이었죠.

제약회사는 엘사가 잉태한 생명체를 연구하기 위해 그 생물을 거액의 돈을 주며 사들이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죠.

그렇게 인조 생명체로 시작된 비극이 비로소 진정한 막을 내립니다.

 

<스플라이스>에 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인조 생명체라는 금단의 소재를 현실의 요소와 잘 버무려냈지만, 그것이 너무 적나라한 탓에 신기하면서도 불쾌한 감정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금기라는 건 인간이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금기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드렌 역의 배우 델핀 샤네끄

여담으로 드렌의 모습을 연출할 때에는 배우의 연기에 CG를 입혔다고 합니다. 인간과는 달리 과하게 넓어진 미간이 바로 그 증거이죠.
또한 그것으로 신비감과 혐오감이 동시에 연출되는 것을 노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로봇공학이나 3d 영상미디어 제작 등에서 등장하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을 연상시키더군요.

로봇이나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어설프게 인간을 닮은 것을 사람들은 비인간형 로봇보다 더욱 혐오한다는 연구 결과에서 유래한 명칭인데, 사실 구태여 미간이 아니더라도 이련 요소는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유독 사람의 얼굴 비례, 특히 눈과 미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죠.

개인적으로 <스플라이스>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무서운 아름다움"이란 건, 어떻게 보면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 그 자체를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익숙하지 않은 느낌과 신비함, 그리고 이와 공존하는 혐오감이나 불쾌감 등을 말이죠.

과학 영역 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된 인간의 심리 등 여러 모로 생각해 볼 게 많은 복잡한 소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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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야마 부시코(Le Ballad De Narayama) -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사회 사이에서 보는 도가 사상에 대한 고찰

 

2019.09.01
오늘 소개할 작품은 1983년 야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감독하여 개봉한 일본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되시겠습니다.


일본어 제목을 해석한다면 <나라 산의 노래> 정도가 되겠군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현재 영화사와 동양 철학에 대한 연구 자료로 자주 거론되는 영화로 유명합니다.


필터링 없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혐오감과 선정성, 그리고 일본에서의 고려장이라는 타이틀로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를 충격에 빠뜨린 작품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죠.
작성자는 영화사에 대해서는 그리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나, 본 영화는 동양 철학 중에서도 노자의 도가 사상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저 역시 철학 전공자로서 처음 도가 사상에 입문했을 때, 본 영화에 관한 과제물을 처음으로 받아 작성했던 적도 있습니다.
도가 사상이라는 것 자체가 노자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무위자연을 주장한다는 특징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당장 노자라는 인물이 실존하는지의 여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문헌과 정보에 따르면,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우주 만물의 형태는 그 근본을 따지면 결국은 17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입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 <노자 도덕경> 속에 있는 '무위 자연'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우주의 근본이며, 진리인 도의 길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무위 자연' 사상입니다. 즉, 법률·도덕·풍속·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죠.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숲 속 같은 '자연' 속에 들어가 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인 그 도(道)를 파악하고 그 안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는 것이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상이 대체 이 영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독자 여러분들은 슬슬 궁금해지겠지요.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하나하나 짚어나가 보도록 합시다.





 



영화는 19세기 일본 동북부에 위치한 척박한 환경을 가진 오지의 작은 마을을 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서 나는 한정된 식량으로 인해, 이 마을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가혹한 관습을 그대로 따르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관습 세 가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 결혼하여 자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장남에 한한다.

2. 식량을 훔치는 것은 중죄이다.

3. 나이 70을 넘긴 노인은 집을 떠나 나라야마에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입 하나를 줄이기 위해 부모를 버리거나, 자식을 버려야 하는 잔인한 선택의 기로를 부여하는 혹독한 관습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오직 장남뿐이기에,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노동력으로 전락하거나, 그럴 여유도 없을 경우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일은 예삿일이었죠. 거기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은 거름으로 쓰기 위해 아무런 장례도 없이 논에 그대로 버려지는 일도 잦았습니다.


여아가 태어나면 화폐나 소금 등으로 팔아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상품가치가 있는 여아가 태어나는 것을 더 선호하기도 했죠.


그렇듯, 각 가정에서 장남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며,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장남에게 거스를 수 없을 뿐더러, 배우자도 맞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개들을 수간하며 풀기도 합니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주인공 타츠헤이(아들)과 오린(어머니)

영화의 큰 줄거리 틀은, 주인공인 타츠헤이와 그의 어머니 오린,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중점으로 서술됩니다.

69살이 되어 나라야마에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어머니 오린, 희귀한 피부병에 걸려 악취로 고생하고 있는 동생 리스케,

곧 결혼을 하는 타츠헤이의 장남 케사키치, 그리고 케사키치의 아내가 될 무능한 며느리인 마츠야 등 여러 복잡한 이야기가 겹쳐지며 진행됩니다.


 

 




곧 나라야마에 가야 함을 깨달은 오린은 자신이 아직 정정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 늙어서 집을 떠나야 함을 어필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 이빨을 돌절구에 부딪쳐 깨뜨려 버립니다.


 




그 와중에 마츠야네 집안은 늘어나는 가족 구성원 때문에 식량을 훔치다 발각되었고, 사위인 케사키치마저 범인인 장인의 따귀를 때리며 잘못을 추궁합니다.

그만큼 먹을 것을 훔치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를 보여주죠.


 




중죄의 대가는 생매장. 일가족 전부가 생매장을 당합니다.

심지어 케사키치의 아이를 임신한 마츠야마저.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오린이 나라야마로 갈 때가 되자 동네 어른들이 모여 젊은이들에게 그 과정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알려주기 시작합니다.

-산에 버려지는 노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아무도 모르게 나가야 하며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

-노인을 지고 나간 자는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그 규율을 기억한 채 주인공 타츠헤이는 어머니 오린을 지게에 지고 길을 떠납니다.


 



나라야마에 도착하자 그들을 반기는 것은 혹한의 시작을 알리는 폭설이었습니다.



 


타츠헤이 : 어머니, 눈이 오는군요.

오린 : 그래, 내가 운이 좋아서 눈이 오는 거란다.


그 눈이 버려진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 세대를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혹독한 선택.

지금까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던 타츠헤이였기 때문에, 그 선택이 쉽지 않았음이 드러납니다.


 


어머니를 버려둔 채 집에 돌아온 타츠헤이는 의연하게 생활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린이 남겨 둔 옷을 나누어 입는 가족들, 아내를 잃고 새 배우자를 찾은 케사키치 등....


산 사람은 살아가고, 죽은 사람은 흔적없이 사라지는 덧없는 마을과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잔인하면서도 다른 문화권에 내어놓기에는 어려운 요소들을 아주 적나라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큰 이슈가 된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나라야마라는 산 속에 고립되어 살아가고 거기에서 형성된 사회관과 그곳의 도덕, 그리고 우리의 현재 사회관을 관객으로 하여금 병치시켜 볼 수 있게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관습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끔 하는 영화, 그 안에서 우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올바른 것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과연 우리를 얽매고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나라야마 부시코'의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 이야기를 나와 가족을 통해, 그리고 나아가 가족과 집단을 통해, 그리고 인간과 동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순환되는 고리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뱀은 쥐를 잡아먹고 동면에 채 못 들어가 죽은 뱀을 쥐가 다시 먹고 죽을 때가 된 할머니는 며느리의 뱃속의 아이가 왠지 자신 같다고 이야기하고, 이처럼 인생사가 자연과 마찬가지로 순환되며 순간의 집착이 부질없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마을은 마치 `원시 공동체' 사회를 보는 듯 합니다. `생계 유지'는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간과 동물의 성관계장면(獸姦) - 강간처럼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것이며, 이 본능을 바탕으로 그것은 마을을 유지하는 `관습' 그리고 `법'으로 적용됩니다.



생존 앞에서 생명은 먹을 입 하나가 더 늘어난 성가신 일이요, 탄생의 신비나 경이로움 같은 우리가 흔히 접하던 생명의 개념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죽음이 도리어 대수롭지 않고 익숙한 것으로 전락하죠.

마치 마츠야를 잃고 오열하던 케사키치가 금세 새 아내를 맞은 것처럼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과 그 기준이 대체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이상적인 것인지 거듭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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