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5 질의응답 스크립트

 

 에반게리온 학술제 스피치 이후 카카오톡 아이디로 연락을 걸어온 익명의 질문자와의 대화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Q. 질문자 
A. 작성자 
로 읽을것. 

Q.간단히 설명하자면 욕구(의지, 목적)를 가지고, 경험을 통해 욕구를 해결할 방법을 고안하고 개선해 욕구를 충족시키는 그런 로봇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도가 아니라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스피치를 주제로 대화하며 사고의 폭을 넓히고 싶다. 

A. 인문학도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도와주겠다. 우선 내용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가? 

Q. 내용에서 크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없으나 질문이 있다.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타자라는 개념을 알고, 타자를 인식할수 있어야 함. 그렇다면어떤 대상이 자신과 같이 의지를 가진 존재. 즉 '타자'임은 어떻게 알 수 있는걸까? 

A. 질문부터 시작해 보겠다. 스피치를 잘 이해했다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Q.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는 존재가 존재함은 부정할수 없다. 생각하는 존재가 나라면 나는 존재하는것이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A.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생각하는 존재가 존재한다.' 와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내가' 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데카르트는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았으나, 의심을 하고 잇는 자기 자신이 존재함은 끝내 의심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왜 이 말이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 라고 해석되는 이유이다. 

Q. 의심을 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것은 어떻게 논증될 수 있는가? 

A. 모든 것을 의심해 본다고 치자. 2+2=4라고는 하지만 어디서 악마가 2+2는 무조건 4다 라고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해도 내가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 의심스럽다면 
이것은 모든 것이 진실이거나, 의심을 하고 있는 내가 실제로 존재하거나, 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진실이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는 불가능에 가갑다. 

Q. 위에서 말한대로, 악마가 존재해서 나에게 어떤것을 의심하게 하는 가능성은 부정되지 못하는것 아닌가? 

A. 악마는 그저 가설일 뿐이다. 악마가 의심하게 하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 아니라, 악마가 있는지의 여부부터 의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Q. 그렇다면 '의심의 발현은 어떤 처리장치를 거친것이므로 처리장치는 존재한다.' 로 해석될 수 있는가? 

A. 어떤 의미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Q. 그렇다면 의심의 주체는 왜 '나'일 수밖에 없는가? 

A.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의심 역시 할 수 없다. 

Q. 자기 자신이 존재하므로, 현재까지 발현된 모든 의심이 내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것은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가? 

A. 의심을 하는 이유는 의심할 수 없는 것(진리)를 찾기 위함이다. 또한 의심이라는 단어에 크게 중점을 둘 필요도 없다. 의심은 진리를 찾기 위한 생각의 방식에 불과하며, 모든 의심이 내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타인의 의심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Q. 납득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A. 지금까지 데카르트의 존재론이었다. 그렇다면 본인이 에바와 연관을 지었던 철학자인 레비나스의 이론으로 넘어가 보겠다. 질문이 있는가? 

Q. 레비나스의 이론은 타인이 존재함으로써 나와 외부를 분리할수 있으며 내 위상을 가늠할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가? 

A. 그 해석은 틀렸다. 타인이 존재함으로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분리하는 것은 맞으나, 그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가늠할 수는 없다. 

Q. 위상의 측정은 비교대상이 있어야 가능하고, 나를 제외한것은 타인이니까 비교대상은 타인밖에 없지 않나? 

A. 공중도덕을 예로 설명해 보겠다. 노약자석에 당신이 앉아 있는데 앞에 노인이 서 있다면 어쩌겠는가? 

Q. 당연히 자리를 양보한다. 

A. 그럼 왜 자리를 양보하는지 두 가지 항목 중 선택해라. 
1. 노인을 노약자석에 앉게 하기 위함이다. 
2. 노인을 앉힘으로서 공중도덕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Q. 2번을 선택하겠다. 

A. 이 선택지의 의도는 타인의 존재를 어떻게 인정하느냐를 구분하는 것이다. 1번 항목은 단순히 타인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이나, 2번 항목은 자신을 공중도덕을 지키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타인을 인정했기 때문에,1번은 레비나스의 이론에 좀더 가깝지만 2번은 레비나스의 이론과 반대된다. 

Q. 순수한 선악이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A. 선악과는 관계가 없다. 이것을 설명하는 이유는 레비나스의 이론이, 타인을 어떠한 수단으로도 간섭하거나 제압할 수 없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노약자석에 노인이 앉는것은 '노인' 이라는 성질을 가진 타인의 권리이며, 우리가 노약자석에 앉았다면 우리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된다. 
그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리를 양보해야 햐며, 어떤 이유에서 자리를 양보했는지의 여부가 자신과 타인 중 어느 쪽을 우선시하는지를 결정한다.

Q. 그렇다면, 타인에 대해 간섭할 능력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에 대해서 간섭할 능력이 있으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A. 후자이다. 

Q. 레비나스의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에바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A. 스피치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다시 한번 설명해 주겠다. 레비나스의 이론은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과 흡사한 면모를 가진다. 

인류보완계획은 자신과 타인의 경계선 (AT필드)를 완전히 허물어, 모든 생명을 하나의 유기체(LCL)로 통합하는 계획이다. 이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바로 거대한 자기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에서는 이를 '어디까지나 자신이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은 없는 세계.' 라고 칭한다. 

Q. 그렇다면 인류보완계획은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 레비나스의 이론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A. 그렇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에서는 이를 레비나스의 이론과 비슷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신지이다. 

신지는 서드 임팩트 이후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할지의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타인이 곧 공포라는 결론을 내린 후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했으나, 그것이 곧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를 중단했다. 불완전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인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인류의 불완전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이 타인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레비나스의 이론과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Q.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해석했다. 

에바에서 신지의 선택은 타인과의 관계는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나, 고통의 총량보다 쾌락의 총량이 크니 타인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의 결과. 

A. 공리주의적인 입장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이론과는 다른 관점이다. 레비나스는 공리주의와 연관된 이론이 전혀 없다. 

Q. 알고 싶은 걸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의문점을 해결할 다리가 생긴 것 같다. 혹시 관련된 키워드를 더 알려줄 수 있는가? 

A.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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