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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서적 발제문

1. 여는글 - 세 번째로 등록된 한국인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2019년 11월, 유네스코는 2021년의 세계기념인물로 김대건 신부를 지정했다. 2012년 탄생 200주년을 맞은 다산 정약용과, 2013년 동의보감 발행 400주년을 맞은 구암 허준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다.
2021년은 1821년 탄생한 김대건 신부의 2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김대건 신부는 당시의 국가였던 조선 계급 사회 내에서 기득권의 삶을 포기하고 평등과 존엄, 생명, 진리 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인물이자, 1784년 천주교가 한국에 전해진 이후 61년만에 탄생한 최초의 한국인 사제요, 10개국 이상에 주보성인 성당까지 존재하는 성인임이 그 이유라고 유네스코는 밝혔다.
유네스코 기념 해는 2년마다 지정되며, 기념 인물 후보자는 1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보편적 지명도와, 50주년/100주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을 기념할 수 있어야 한다. 김대건 신부는 당시 국가였던 조선에 천주교와 그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과 대만, 심지어 필리핀까지 오가며 신학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조선 사람들에게 열성적으로 천주교를 알리다 순교하였으며,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기념했기 때문에 이 조건에 모두 부합한다. 본 글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발행한 서적을 토대로 그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것이 갖는 역사적, 철학적 가치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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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에 위치한 솔뫼성지의 김대건 신부 생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여 헌화와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
(08.15.2014)
2. 김대건 신부의 생애
1784년 최초의 세례를 받은 이승훈을 시작으로 조선에 천주교가 유입되고, 10년 후 조선으로 밀입국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활동으로 천주교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1800년대에 이르러 조선의 천주교도는 어느새 만 명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나 천주교 탄압에 소극적이었던 정조가 죽자,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300여명의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기반이 무너졌으며 생존한 교인들의 대다수가 신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 중에는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그리고 종조부 김종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대건은 1821년 충남 당진의 솔뫼마을에서 김제준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827년 정해박해 이전에 가족과 고향을 떠나 용인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의 피에르 모방 신부(1803~1839)가 지방 교우촌 순방을 목적으로 용인의 은이 성지를 방문할 때즈음 김제준 가족도 그곳으로 가서 성사를 받았고, 이 때 모방 신부는 어린 김대건을 보고 신학생으로 선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가 1836년 7월 11일이었다.
당시 모방 신부는 이미 같은 해 2월 6일에 최양업(1821~1861), 그리고 3월 14일에 최방제(불명~1837)를 신학생으로 선발한 상태였으며, 거처였던 정하상(정약종의 차남, 정약용의 조카/1795~1839)의 자택에서 이 두 소년에게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김대건 역시 모방 신부를 따라 이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이 셋이 배우던 언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신학 수업에 가장 중요한 라틴어였을 것이라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추측하고 있다.
1836년 12월 2일, 조선 신학생 셋은 모방 신부와 십자가 앞에서 조선교구 신부가 되어 봉사할 것임을 서약하고 서울을 떠나 약 7개월 후인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한다. 그리고 임시로 설립된 조선 신학교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들에게 불어, 라틴어, 신학, 서양철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최방제가 위열병으로 사망했고, 그들은 1839년 4월의 마카오 소요 사태를 피해 필리핀의 롤롬보이 (마닐라 인근의 도시)로 피신하여 계속 교육을 받았다.
이후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2년까지 여러 선교사들의 교육을 받아오면서, 2월 15일 중국의 외교 사절을 목적으로 파견된 프랑스 군 장교 세실 함장의 군함인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된다. 조선 원정을 원했던 세실 함장과 이를 통해 조선 교회와의 연락을 재개할 계획을 세운 리브와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가 이들을 통역을 위해 동행할 수 있게 해 준 덕분이었다.
마카오를 떠난 이들은 마닐라, 대만, 만주 등을 오가며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1843년 4월, 만주에 자리 잡은 작은 교우촌인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소팔가자에서 김대건은 그곳의 주교인 페레올을 만나고 그의 지시를 따라 1844년 2월 5일 입국로 탐색을 위해 거처에서 2천리나 떨어진 두만강 하구의 도시인 훈춘으로의 여정을 감행한다. 2개월 후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동년 12월에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게 된다. 부제품을 받게 된 정확한 날짜는 기록에 없으나, 1844년 12월 10일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안드레아(김대건)과 토마스(최양업)은 이미 부제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12월 10일, 혹은 그 이전에 부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를 먼저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고 입국을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김대건 부제는 1월 15일 의주와 평양을 거쳐 한양에 도착한다. 조선을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귀국한 김대건 부제는 해로를 통한 입국을 위해 배를 구매하고, 지도인 조선전도를 제작하였으며 서울 석정동에 선교사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한 후 열한 명의 신자들과 함께 제물포에서 상해를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닷새 간의 험난한 항해를 거쳐, 김대건 부제 일행은 중국 배를 만나 보호를 받으며 상해 앞바다인 오송에 도착했고, 오송에 주둔한 영국군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1845년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마카오에 있던 페레올 주교는 상해에 도착했다는 김대건 부제 일행의 연락을 받아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로 달려갔고, 이들은 상봉에 성공한다.
동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의 업적을 치하하여 상해 부근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서품식을 거행하였고, 이로서 김대건은 한국 역사상 첫 번째 신부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24일 상해의 횡당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열었으며, 31일에는 함께 여정을 떠났던 열한 멍의 신자, 페레올 주교, 그리고 다블뤼 신부와 함께 조선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 일행의 항해는 순조롭지 못했고, 그들의 배 라파엘호가 여러 번 침몰의 위기를 겪다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 표착한다.
이후 라파엘호는 제주도를 떠나 전라도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면서 일행은 강경 부근에 위치한 교우촌인 나바위에 도착하게 된다. 이 때가 1845년 10월 12일이었으며,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조선어를 배웠으며, 김대건 신부는 그 인근, 특히 용인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만난 모친과 부활절을 보낸 후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는 해로를 통해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한 통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들어 만주에 머물고 있는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다. 의주 장면의 국경 감시가 삼엄해지자, 결국 두만강 근처의 경원을 통해 시장이 열리는 때를 틈타 둘을 입국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선 국경에 있는 마을에 머물며 입국할 때를 기다리다 중국 관리에게 발각되어 오랫동안 심문을 받고 요동으로 쫓겨나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첫 계획이 실패하고, 김대건 신부는 1846년 5월 일곱 뱃사공과 함께 백령도에서 어업을 하고 있던 중국 어선들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일행의 동선 중 하나였던 순위도의 등산첨사인 관장이 중국 배들을 쫓아내기 위해 김대건 신부 일행의 배를 빌리고자 했고, 신부는 공사로 양반의 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조선의 법을 내세워 배를 빌려주지 않았다.
관장은 이를 의심해 포졸들로 하여금 뱃사공을 잡아 온갖 신문을 거듭한 끝에 김대건 신부가 천주교도임을 알아차리고 1846년 6월 5일 밤 김대건 신부는 체포되고 만다.
체포된 김대건 신부는 6월 13일부터 7월 19일까지 여섯 차례나 혹독한 문초를 받았으나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똑같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관련자를 대거나 신부로서의 소명을 회피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순교의 각오를 다지며 세 통의 서한을 쓰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렸다. 하나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최양업 부제에게, 또 하나는 페레올 주교에게, 마지막 하나는 조선의 모든 천주교 신자들에게 남기는 서한이었다.
그리고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26년이란 짧은 생은 열두 망나니의 칼질로 막을 내리게 된다.
관리들은 김대선 신부의 시신을 새남터에 묻고 신자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감시인까지 붙여 놓았으나, 이후 젊은 교우들이 심야를 틈타 시신을 수습하여 안성 미리내에 이장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1991년, 미리내 성지에 김대건 신부와 이에 연관된 인물들의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 성당>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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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의 김대건 신부상
3. 김대건 신부의 업적
1837년부터 1842년까지 마카오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학문을 익힌 김대건 신부는 불어, 라틴어, 중국어까지 활용하여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총 서른한 통의 서한과, 사제와 수도자를 주제로 하여 신앙의 교훈을 설명하는 라틴어 작문 시험 답안지,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며 페레올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보고서였던 <훈춘 기행문>, 그 과정에서 그린 지도 <조선전도>, 그리고 서한들 중 열여섯번째 서한에 동봉된 <조선 순교사 보고서>이다.
이외에도 옥중에서 영국산 세계 지도를 번역하였고, 채색한 두 장의 세계 지도와 이에 기반한 <지리 개설서>를 편찬했다고 알려지나, 오늘날 전해지지 못했다.
또한 선교 활동과 프랑스 선교사 입국로 개척 역시 그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데, 1845년 사제품을 받고 1846년 순교하기까지 약 13개월간이라는 짧은 사목 생활이었으나, 진지하게 성서를 집전하고 교리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데 정성을 다하여 많은 인망을 얻었다. 체포된 이후에도 옥중에서 함께 갇혀있던 교우들에게는 고해성사를 통한 격려를, 예비 신자들에게는 세례를, 그리고 자신을 체포한 관장과 포졸들, 그리고 조정 대신들과 감사들에게도 적극적인 선교를 일삼았다.
본 발제문의 참고자료였던 기념서적의 저자 김정수 신부(1947~현재)는 김대건 신부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위대함이 바로 이 시기와 상황에 개의치 않고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했던 시도에서 나온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김대건 신부의 이 짧지만 강렬한 생애는 종교와 정치, 삶과 신앙, 국내와 국외의 여러 영역을 거치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삶의 지표를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희년이다. 일곱 해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번 지나야 오는 50년마다 돌아오는 해요, 성경은 이 해를 거룩하게 지내라 명시한다. 하느님이 주시는 해방과 평등을 가시화하는 해로 지내자는 것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21년 김대건 희년 주제를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라고 정했다. 김대건 신부의 서른한 통의 서핸 중 스무 번째 서한에 담긴 문구이자, 관아에 체포된 김대건 신부에게 한 관장의 질문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이에 망설임 없이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했으며, 175년이 지난 지금 이 물음은 다시 천주교인들에게 돌아온다. 성인이 지녔던 확고한 신앙을 되새겨 천주교인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되묻고 있는 셈이다.
4. 닫는글 - 175년만에 돌아온 물음
김대건 신부의 만 25년의 삶을 냉정하게 살피면, 당시 조선 정부에 반하는 운동을 일삼으며 각국, 각지를 오가던 젊은이가 잡혀서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죽은 것일 수도 있다. 이에 한 술 더 떠서 조정에서는 이런 불순분자를 처형했으니 조선의 체제를 수호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모든 성인들의 특성은 그들의 주인이 부르시면 즉시 자신이 몸담은 곳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고향일 수도 있고, 고국일 수도 있으며, 현재 살아가고 있는 지상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모든 진리를 향한 호기심에 대한 해답은 항상 대가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요, 진리를 위해 떠난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걸고 떠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는 단순히 신학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학문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묵묵히 임했던 김대건 신부는 단순히 종교에 대한 열정을 지녔던 신부로서만 보아야 할 인물이 아니다. 그의 업적과 생애에 담긴 정신과 마음을 이해하고, 이를 현 시대와 연결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작성자 금강야차. 07.18. 2021
참고자료 : <성 김대건 바로 알기> - 김정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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