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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5 한국근현대철학 : 함석헌 1
글
한국근현대철학 : 함석헌
철학도의 일상
2022. 10. 15. 11:56
-원제
한국 근현대철학사의 마지막 민주투사
신천 함석헌과 씨알 사상
작성일자 : 2017.06.01
#1. 여는글
2017년 3월, 제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했던 국민의당의 안철수 의원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
함석헌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민중운동가, 사상가, 문필가였으며, 대한민국에서 무척 보기 드문 퀘이커 파 신도였다. 그러나, 본인이 도덕경을 연구하고 직접 강의도 하는 등, 특정 종교나 교파의 주장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함석헌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그를 ‘대한민국의 마하트마 간디.’ 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군사 정권이 지배하던 독재 시대에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비폭력주의와 사회사상에 매진하며 무려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로 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절대로 부족하지 않은 별칭이기도 하다. 다만, 간디와의 명백한 차이점 역시 존재하는데,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투쟁방식을 추구한 간디와는 달리, 그는 ‘비폭력 저항주의.’를 추구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설명하게 될 것이다.
한국 근현대철학사의 마지막 민주투사
신천 함석헌과 씨알 사상
작성일자 : 2017.06.01
#1. 여는글
2017년 3월, 제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했던 국민의당의 안철수 의원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
함석헌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민중운동가, 사상가, 문필가였으며, 대한민국에서 무척 보기 드문 퀘이커 파 신도였다. 그러나, 본인이 도덕경을 연구하고 직접 강의도 하는 등, 특정 종교나 교파의 주장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함석헌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그를 ‘대한민국의 마하트마 간디.’ 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군사 정권이 지배하던 독재 시대에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비폭력주의와 사회사상에 매진하며 무려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로 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절대로 부족하지 않은 별칭이기도 하다. 다만, 간디와의 명백한 차이점 역시 존재하는데,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투쟁방식을 추구한 간디와는 달리, 그는 ‘비폭력 저항주의.’를 추구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설명하게 될 것이다.
#2. 함석헌/생애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일명 사자섬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허는 받지 못한 한의사로, 정규교육이 아닌 스스로 의술을 공부해 인근 마을의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50이 넘어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 정도로 배움에 열정이 있으신 분이었다. 친척 중에서도 의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숙부뻘 되는 함일형, 그리고 그의 자식들인 함석규, 함석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가담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2년 후 서울에 올라와 우연히 친척인 함석규 목사를 만나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이 때 교장이었던 유영모와의 만남을 가졌고, 이는 함석헌 본인이 신앙생활의 첫 번째 대사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유영모를 통해 노자를 처음 접한 그는, 이 시기에 H, G 웰스의 글인 <세계문화사대계>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세계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자신의 입장이 이 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1923년 도쿄로 유학을 떠난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의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여기서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 연구회에 들어가게 되는데,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우치무라가 교회의 형식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 전도를 시작하면서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했기 때문에 무교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함석헌은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만나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을 모아 1927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글도 발표한다.
그러나 성서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으면서, 세속에 무관심하고 현대 정치에 냉담한 무교회주의에 회의감을 느낀 함석헌은 이를 계기로, 성서 이외에 불교나 노장사상에도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1940년대에 그는, 당시의 제국주의 사회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 평화주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가 전쟁을 초래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장사상 같은 동양 고전철학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방 이후, 그는 1945년 12월, 소련군정 치하에서 신의주 반공학생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되었고, 소련군에 의해 투옥되는 고초를 겪다, 1947년 가족을 두고 월남한다.
월남 후 함석헌은 성경공부모임을 만들고 공개강연을 하는 등,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활동을 이어 나갔지만,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집권세력과 결탁한 한국기독교의 모습을 목도하고, 1955년,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이 때, 마하트마 간디를 사회적 실천의 모범으로 보았으며, 비폭력운동을 통해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5. 16 이후와 대한민국 제 3공화국 시대에는 사상계에 ‘5. 16을 어떻게 볼까?’ 를 기고하면서, 언론이 5. 16에 대해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또한, 군인들이 어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이 글로 인해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그는 퀘이커 교도들과 교류를 가지고 퀘이커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몇 개월간을 체류하다 유럽으로 떠났다. 그 이후에는 퀘이커 교도가 된 채 귀국하여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한다. 1970년 그는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방식으로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비겁한 언론과 지식인과도 맞서 싸웠다.
이 싸움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 후 제 5공화국까지도 계속된다. 전두환 정권은 <씨알의 소리> 같은 비판적인 모습의 언론을 전부 폐간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강연을 비롯한 각종 투쟁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1984년, 그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으며, 1985년에는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 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별세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89세였다.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일명 사자섬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허는 받지 못한 한의사로, 정규교육이 아닌 스스로 의술을 공부해 인근 마을의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50이 넘어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 정도로 배움에 열정이 있으신 분이었다. 친척 중에서도 의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숙부뻘 되는 함일형, 그리고 그의 자식들인 함석규, 함석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가담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2년 후 서울에 올라와 우연히 친척인 함석규 목사를 만나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이 때 교장이었던 유영모와의 만남을 가졌고, 이는 함석헌 본인이 신앙생활의 첫 번째 대사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유영모를 통해 노자를 처음 접한 그는, 이 시기에 H, G 웰스의 글인 <세계문화사대계>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세계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자신의 입장이 이 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1923년 도쿄로 유학을 떠난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의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여기서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 연구회에 들어가게 되는데,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우치무라가 교회의 형식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 전도를 시작하면서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했기 때문에 무교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함석헌은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만나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을 모아 1927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글도 발표한다.
그러나 성서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으면서, 세속에 무관심하고 현대 정치에 냉담한 무교회주의에 회의감을 느낀 함석헌은 이를 계기로, 성서 이외에 불교나 노장사상에도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1940년대에 그는, 당시의 제국주의 사회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 평화주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가 전쟁을 초래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장사상 같은 동양 고전철학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방 이후, 그는 1945년 12월, 소련군정 치하에서 신의주 반공학생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되었고, 소련군에 의해 투옥되는 고초를 겪다, 1947년 가족을 두고 월남한다.
월남 후 함석헌은 성경공부모임을 만들고 공개강연을 하는 등,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활동을 이어 나갔지만,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집권세력과 결탁한 한국기독교의 모습을 목도하고, 1955년,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이 때, 마하트마 간디를 사회적 실천의 모범으로 보았으며, 비폭력운동을 통해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5. 16 이후와 대한민국 제 3공화국 시대에는 사상계에 ‘5. 16을 어떻게 볼까?’ 를 기고하면서, 언론이 5. 16에 대해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또한, 군인들이 어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이 글로 인해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그는 퀘이커 교도들과 교류를 가지고 퀘이커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몇 개월간을 체류하다 유럽으로 떠났다. 그 이후에는 퀘이커 교도가 된 채 귀국하여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한다. 1970년 그는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방식으로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비겁한 언론과 지식인과도 맞서 싸웠다.
이 싸움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 후 제 5공화국까지도 계속된다. 전두환 정권은 <씨알의 소리> 같은 비판적인 모습의 언론을 전부 폐간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강연을 비롯한 각종 투쟁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1984년, 그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으며, 1985년에는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 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별세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89세였다.

#3. 씨알 사상
함석헌의 사상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이나,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생명존중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생명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평화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의 핵심으로 民 대신 "씨알" 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한 바 있다. 본래 이 "씨알"은 1948년 무렵에 함석헌이 월남한 뒤 옛 스승이었던 유영모와 재회하여 그의 대학(大學) 강의를 듣던 중, 유영모가 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을 참신하게 여겨 고안해낸 표현이다. 그는 대학의 한 부분인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고,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무름에 있나니라" 라고 해석했다. 民은 백성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한자였기 때문에 백성이니 민초니 하는 한자 대신 순우리말인 "씨알"을 쓰자고 주장한 것이 그 시초이다.
또한 이 "씨알"은 그것 자체로 사상이기도 한데, 씨알 생명(=백성, 일반 시민들)이 지니고 있는 5가지 특성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체성 - 자신들의 이름을 "씨알"이라고 짓고 그걸 가짐으로써 주체성을 자각할 수 있다.
근본성 - 씨알은 씨앗과 알이며,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이다. 씨알 역시 인간 사회의 근본이면서도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으나, 결국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겼다.
순수성 - 알이라는 말이 접두사로 쓰이면 군더더기 없는 순수한 형태를 나타낸다. 씨알 역시 생명의 본질을 오염시키려는 악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고 비판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생동성 - 생명은 끊임없이 자라고 변화하며, 이에 따라 씨알(=시민들)을 압제하는 제도주의-형식주의-절대주의에 저항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관계성 - 나무나 잡초가 여럿이 있으면 태풍과 홍수를 막듯이 씨알 역시 무리를 지어서 삶의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4. 닫는 글
함석헌은 언제나 민중의 자리에서 민중을 위해 살아왔으며, 믿음과 행동, 생각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개인, 특정 지역, 특정 국가, 특정 민족 등의 경계를 넘어 전 우주의 생명과 평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생각은 곧 실천이었으며,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고, 자유, 자치, 자연의 가르침을 공유하였으며, 인간과 사회, 자연을 늘 함께 생각했다.
에콜로지, 아나키즘, 세계민주주의, 비폭력주의, 생활의 절제, 평화주의, 민중민주주의, 직접행동주의, 공동체주의 등 함석헌이 추구했던 가치들 중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도 특히 그가 보여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함석헌을 ' 시대, 그 나라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대, 그 나라에서는 대단히 중요하고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 시대, 우리 나라에 맞게 충분히 재검토하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난무하는 폐단을 발본색원하고, 나라를 도로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함석헌의 사상을 더욱 완전하게, 비판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주체적이며 현실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함석헌과 그의 사상을 뛰어넘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인류 전체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함석헌은 언제나 민중의 자리에서 민중을 위해 살아왔으며, 믿음과 행동, 생각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개인, 특정 지역, 특정 국가, 특정 민족 등의 경계를 넘어 전 우주의 생명과 평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생각은 곧 실천이었으며,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고, 자유, 자치, 자연의 가르침을 공유하였으며, 인간과 사회, 자연을 늘 함께 생각했다.
에콜로지, 아나키즘, 세계민주주의, 비폭력주의, 생활의 절제, 평화주의, 민중민주주의, 직접행동주의, 공동체주의 등 함석헌이 추구했던 가치들 중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도 특히 그가 보여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함석헌을 ' 시대, 그 나라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대, 그 나라에서는 대단히 중요하고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 시대, 우리 나라에 맞게 충분히 재검토하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난무하는 폐단을 발본색원하고, 나라를 도로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함석헌의 사상을 더욱 완전하게, 비판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주체적이며 현실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함석헌과 그의 사상을 뛰어넘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인류 전체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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