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국근현대철학 : 함석헌
한국 근현대철학사의 마지막 민주투사
신천 함석헌과 씨알 사상
작성일자 : 2017.06.01
#1. 여는글
2017년 3월, 제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했던 국민의당의 안철수 의원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
함석헌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민중운동가, 사상가, 문필가였으며, 대한민국에서 무척 보기 드문 퀘이커 파 신도였다. 그러나, 본인이 도덕경을 연구하고 직접 강의도 하는 등, 특정 종교나 교파의 주장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함석헌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그를 ‘대한민국의 마하트마 간디.’ 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군사 정권이 지배하던 독재 시대에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비폭력주의와 사회사상에 매진하며 무려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로 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절대로 부족하지 않은 별칭이기도 하다. 다만, 간디와의 명백한 차이점 역시 존재하는데,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투쟁방식을 추구한 간디와는 달리, 그는 ‘비폭력 저항주의.’를 추구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설명하게 될 것이다.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일명 사자섬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허는 받지 못한 한의사로, 정규교육이 아닌 스스로 의술을 공부해 인근 마을의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50이 넘어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 정도로 배움에 열정이 있으신 분이었다. 친척 중에서도 의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숙부뻘 되는 함일형, 그리고 그의 자식들인 함석규, 함석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가담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2년 후 서울에 올라와 우연히 친척인 함석규 목사를 만나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이 때 교장이었던 유영모와의 만남을 가졌고, 이는 함석헌 본인이 신앙생활의 첫 번째 대사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유영모를 통해 노자를 처음 접한 그는, 이 시기에 H, G 웰스의 글인 <세계문화사대계>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세계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자신의 입장이 이 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1923년 도쿄로 유학을 떠난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의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여기서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 연구회에 들어가게 되는데,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우치무라가 교회의 형식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 전도를 시작하면서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했기 때문에 무교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함석헌은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만나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을 모아 1927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글도 발표한다.
그러나 성서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으면서, 세속에 무관심하고 현대 정치에 냉담한 무교회주의에 회의감을 느낀 함석헌은 이를 계기로, 성서 이외에 불교나 노장사상에도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1940년대에 그는, 당시의 제국주의 사회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 평화주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가 전쟁을 초래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장사상 같은 동양 고전철학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방 이후, 그는 1945년 12월, 소련군정 치하에서 신의주 반공학생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되었고, 소련군에 의해 투옥되는 고초를 겪다, 1947년 가족을 두고 월남한다.
월남 후 함석헌은 성경공부모임을 만들고 공개강연을 하는 등,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활동을 이어 나갔지만,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집권세력과 결탁한 한국기독교의 모습을 목도하고, 1955년,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이 때, 마하트마 간디를 사회적 실천의 모범으로 보았으며, 비폭력운동을 통해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5. 16 이후와 대한민국 제 3공화국 시대에는 사상계에 ‘5. 16을 어떻게 볼까?’ 를 기고하면서, 언론이 5. 16에 대해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또한, 군인들이 어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이 글로 인해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그는 퀘이커 교도들과 교류를 가지고 퀘이커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몇 개월간을 체류하다 유럽으로 떠났다. 그 이후에는 퀘이커 교도가 된 채 귀국하여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한다. 1970년 그는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방식으로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비겁한 언론과 지식인과도 맞서 싸웠다.
이 싸움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 후 제 5공화국까지도 계속된다. 전두환 정권은 <씨알의 소리> 같은 비판적인 모습의 언론을 전부 폐간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강연을 비롯한 각종 투쟁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1984년, 그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으며, 1985년에는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 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별세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89세였다.

#3. 씨알 사상
함석헌의 사상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이나,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생명존중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생명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평화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의 핵심으로 民 대신 "씨알" 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한 바 있다. 본래 이 "씨알"은 1948년 무렵에 함석헌이 월남한 뒤 옛 스승이었던 유영모와 재회하여 그의 대학(大學) 강의를 듣던 중, 유영모가 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을 참신하게 여겨 고안해낸 표현이다. 그는 대학의 한 부분인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고,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무름에 있나니라" 라고 해석했다. 民은 백성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한자였기 때문에 백성이니 민초니 하는 한자 대신 순우리말인 "씨알"을 쓰자고 주장한 것이 그 시초이다.
또한 이 "씨알"은 그것 자체로 사상이기도 한데, 씨알 생명(=백성, 일반 시민들)이 지니고 있는 5가지 특성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체성 - 자신들의 이름을 "씨알"이라고 짓고 그걸 가짐으로써 주체성을 자각할 수 있다.
근본성 - 씨알은 씨앗과 알이며,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이다. 씨알 역시 인간 사회의 근본이면서도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으나, 결국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겼다.
순수성 - 알이라는 말이 접두사로 쓰이면 군더더기 없는 순수한 형태를 나타낸다. 씨알 역시 생명의 본질을 오염시키려는 악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고 비판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생동성 - 생명은 끊임없이 자라고 변화하며, 이에 따라 씨알(=시민들)을 압제하는 제도주의-형식주의-절대주의에 저항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관계성 - 나무나 잡초가 여럿이 있으면 태풍과 홍수를 막듯이 씨알 역시 무리를 지어서 삶의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함석헌은 언제나 민중의 자리에서 민중을 위해 살아왔으며, 믿음과 행동, 생각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개인, 특정 지역, 특정 국가, 특정 민족 등의 경계를 넘어 전 우주의 생명과 평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생각은 곧 실천이었으며,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고, 자유, 자치, 자연의 가르침을 공유하였으며, 인간과 사회, 자연을 늘 함께 생각했다.
에콜로지, 아나키즘, 세계민주주의, 비폭력주의, 생활의 절제, 평화주의, 민중민주주의, 직접행동주의, 공동체주의 등 함석헌이 추구했던 가치들 중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도 특히 그가 보여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함석헌을 ' 시대, 그 나라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대, 그 나라에서는 대단히 중요하고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 시대, 우리 나라에 맞게 충분히 재검토하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난무하는 폐단을 발본색원하고, 나라를 도로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함석헌의 사상을 더욱 완전하게, 비판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주체적이며 현실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함석헌과 그의 사상을 뛰어넘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인류 전체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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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현대프랑스철학 : 레비나스
1. 여는글 : 존재론의 모순과 이에 반한 자
고금을 막론하고 프랑스 철학에 처음 입문했을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철학자와 어구를 꼽으라면, 역시 데카르트와 그의 말로도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 보던 데카르트가 끝내 의심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서양 철학을 공부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식 주체 중심의 존재론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 중심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나의 세계"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조차도 "나의 세계"로 끌어들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본 글에서 다루게 될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E.Levinas/1906~1995) 되시겠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1906~1995)
2. 레비나스 / 생애와 사상
리투아니아의 코우노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유대인 예힐 레비나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던 그는 6세부터 집에서 히브리어 개인 교습을 받고, 성경과 탈무드를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외에도 리투아니아의 모국어였던 러시아어를 접하면서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슈킨 등의 작품들도 읽게 된다. 이들은 그의 사상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레비나스의 일가족은 우크라이나로 피신해야 했으며, 레비나스는 그로 인해 "어린 시절이 매우 짧았다."고 말한다.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말살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부모와 두 형제를 잃은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하고 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1923년, 레비나스는 프랑스의 쉬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28-29년에는 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의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그의 철학자로거의 활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다. 그의 철학적 경향은 전쟁동안 그가 겪은 경험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 학살과정에서 희생된다. 레비나스 자신은 프랑스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전쟁포로로 독일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며, 그의 부인과 딸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지냈다.
1930년,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오스트리아의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내세운 '나와 너'의 관계에 크나큰 관심을 가졌다. 레비나스가 주로 다루는 타자에 관한 문제를 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계기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34년, 레비나스는 <히틀러주의 철학에 대한 몇 가지 반성>을 내면서, 전면 전쟁을 감행하고자 하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위험을 만천하에 드러내려 한다. 폭력과 인종주의의 뿌리를 노출시키고 '다르게 사유함.' 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해보려는 치열한 노력도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이후 1963년 푸아티에 대학 철학 교수로 임명된 레비나스는 철학사를 가르치다 1967년 파리의 낭테르 대학을 거쳐, 1973년 소르본 대학의 철학 교수로 활동하다 1976년 정년퇴임한다.
이후 여생을 보내던 그는 결국 1995년 1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3. 타자성의 철학
서양철학은 존재자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존재자의 본질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인식론의 역사였으며, 그 중심에는 인간의 주체적 자아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자아중심적인 존재론과 인식론을 거부하고 윤리학이 그보다 더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생각하는 나」대신「윤리적인 나」가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윤리적인「나」는 누구인가? 윤리적인 나는 타자와 대면하여 자아중심적인「나」의 자발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나」이다. 윤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도덕성이 아니며,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해 주는 단순한 지침도 아니다. 윤리란 바로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자아중심적인 자발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자아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찾아 나서는데서 윤리는 시작된다는 것이다.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타인의 타자성에 근거한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이 열린다. 자아의 자기동일성 보다는 타인이 더 우선적이라는 데에 윤리적 의식의 본질이 있다.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타인은 우선적으로 자아에 대하여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외재성이다.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로 통합시킬 수 없는 절대적으로 다름, 즉 절대적인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 타인은 유한한 자아의 사유대상이 아니며, "떼어내어진, 절단된"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절대적 타자성」은 "자아에 종속되지 않고 자아로부터 절단된 타자성"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행동은 폭력이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강령이 분명해졌다.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대로 있게 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강령은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인정해 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정의는 사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정의에 기초한다: "amo volo ut sis"(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인 그가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랑이 타인을 절대적인 타인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라면 타인의 절대적 타자성은 어떻게 보증되는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타자를 만나야 하는가? 우리가 만나는 타자의 종류에 따라 그에 대한 위리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타자는 크게 사물로서의 타자와 타인으로 타자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세분된다. 우리는 사물로서의 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사물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어떤 목적을 위해 기여하는 도구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물에 대해 잘못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태도가 인간관계에까지 확장된다면 모든 관계의 파멸이다. 사물은 도구가 아니다. 사물에는 세계가 있다. 세계는 사방이다. 사방은 동, 서, 남, 북의 방위만이 아니다. 사물에는 하늘과 땅이 들어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있다. 하늘과 땅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며 하나님의 은총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의 존재의 보증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물로서 강물에는 그 물을 지탱해 주는 땅이 있으며, 그 물이 기원된 하늘이 있으며, 그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는 죽을 자들이 있으며, 죽을 자들을 위해 그 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있다. 우리의 세계는 하늘과 땅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는 사물 속에서 사방으로서의 이런 세계를 발견하며, 또 발견해야 한다. 사방으로서의 이 세계는 한 사물을 사물이게 해주는 사물의 사물성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물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 사물의 사물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사물에서 세계를 발견해야 하며 그 세계를 보호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세계의 거주자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보존하면서 사물과 함께 세계에 거주하는 자이다. 우리는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함께 거주하는 자이어야 한다. 어떻게 거주함이 마땅한가?
1. 인간은 그가 땅을 구원하는 한 거주한다. 그는 땅을 개발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작함으로써 거주해야 한다.
2. 인간은 하늘을 하늘로서 수용하는 한 거주한다.
3. 인간은 신적인 것을 신적인 것으로서 기다리는 한 거주한다.
4. 인간은 그의 고유한 본질 즉 죽음을 죽을 수 있는 본질에 순응하여 잘 죽을 수 있는 한 거주한다.
모든 문화와 문명은 이러한 거주함의 방식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 한에서 문명은 파괴가 아니고 건설이 될 것이다. 인간은 사물을 건설하면서 사물과 함께 세계에 거주해야 한다. 건설할 때는 사물 속에 들어있는 세계 즉 사방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의 탐욕스런 개발정책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그 결과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사물 속에 들어있는 세계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거기에 사유하는 인간의 본질이 있다. 인간의 사유능력은 바로 사물 속에서 세계를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인간은 사물로서의 타자를 대할 때 사물의 사물성을 고려해야 한다. 즉 사물 속에서 사방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타인은 도구도 아니며 사물도 아니다. 타인은 이 사물의 세계에 함께 거주하는 자이다. 우리는 타인을 함께 거주하는 자로 대해야 한다. 땅에 함께 거주하면서 하늘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자로 대해야 한다. 그런데 거주자들 사이에는「사이」가 있다. 이「사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얼굴」이다. 사람(人)은 사이(間)에 있으며 그 사이에는 얼굴이 있다는 것이다. 얼굴을 매개로 우리는 서로 만나며 또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통해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편에서는 타인이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는 뜻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얼굴을 가지고 타인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먼저 타인은 나에게 얼굴을 통해 다가온다. 내가 타인의 얼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듯이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타인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어떤 것인가?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의로 피할 수 없는 낯선 침입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단지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이러한 관계는 나의 주관적 지배성이 배제된 「관계성 없는 관계」이다. 즉 자아와 타자는 서로 상호침투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자아는 단지 타자를 지각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타자를 수용할 때 타자는 더 이상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내면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접촉점이 된다.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살기를 주장하기 이전에 먼저 타인의 절대타자성이 긍정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타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상생) 존재자로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 '(Ethics precedes ontology)' 라고 레비나스가 일컫는 "타자성의 철학." 이다.
4. 닫는글
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한 부모와 두 동생의 학살, 국사사회주의의 냉혹함, 스탈린주의와 테러리즘, 지역 간의 분쟁 등, 20세기를 점철했던 이 참혹한 현실들은 레비나스로 하여금 서양철학을 근본에서 톺아보게 했다. 레비나스의 결론은 서양철학과 전쟁이 깊이 결탁해 있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존재, 정신, 이성, 역사 따위를 중심축으로 하여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이런 시도는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동일성의 철학, 타자를 전체나 체계 속에서 파악하는 전체성의 철학으로 귀착하였다. 그런 한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질서를 통해 인간을 강제하며 인간의 인격성을 중단시키고, 전체의 미래를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전쟁은 서양철학의 전체론적 특성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이 전체주의로 발전하는 것을 레비나스는 두려워했다. 이미 나치즘이라는 사례로 이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서양의 근대는 이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근대적 주체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사회를 포함한 세계 전체를 이해한다. 이 근대적 주체에게 소위 근대적 이성은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봉사하였고, 세계는 계산 가능하고,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인간의 이해(理解)와 이해(利害)는 인간 간의 갈등으로 힘의 논리로 이어졌고 곧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으로 극화되었다.
레비나스의 사상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란, 폭력과 전쟁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전체론을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해 있는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타자’와‘ 윤리’다. 타자와 윤리라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뭐 타자와 윤리적 관계를 맺으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일까?
놀랍게도 레비나스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현재 우리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타자는 존중된다. 그 이유는 그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타자도 인격을, 인간의 존엄성, 자유, 권리 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에서 타자가 존중되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이 상실되는 한 즉 타자가 진정한 타자로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타자와 내가 또 무수한 타자들이‘ 동일한 독립적인 개인’으로 간주되는 한에서다. 타자의 다름과 독특성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자는 주장 또한, 나는 존중받아야 하고 나의 불가침의 영역은 안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배면이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권은 타인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면 타당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나의 자리가 나의 자리일 수 없다는 이 극단적인 윤리적 의식은 신자유주의와 경쟁 이데올로기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무시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제공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우리 모두가 성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레비나스는 단지 인간의 성스러움을 이야기할 뿐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근본적 됨됨이가 자기이해를 고수하고 확장하려는 코나투스적 존재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자기 삶에 대한 집착은 넘어서야 할 대상이다. 타자에 응답하는 책임지는 삶. 나의 것을 내어 타자를 환대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예로 든 과부, 고아, 이방인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존재한다. 우리 시대의 타자는 경제적 약자, 성적 소수자, 난민, 이주 노동자, 노숙자, 여성일 수도 있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자들, 혹은 직장을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내몰린 해고 노동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와 대면하는 그 모두가 타자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타자는 무한하고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경쟁이 판치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현대의 신 자유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이 얼마나 달콤하고 또 내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 강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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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국근현대철학 : 동학
원제 : 인간의 ‘행복’을 위한 ‘종교’
아수라장 속에서 떠오르며 빛났던 ‘동학’
작성일자 : 03.23.2017
1.여는글 : 혼돈과 종교
인간은 굶주린 상태에서 배부른 상태를 원해 왔으며, 비바람을 뒤집어쓰며 추위에 떠는 상태에서 견고한 지붕과 벽이 있는 집과 의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행복이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 정신적인 면에도 일정부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만족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정신적인 면을 추구하여 왔다. 한 가지 예로 죽음은 예측할 수 없는 불가피한 손실이나, 종교를 통해 사후(死後)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일정부분 해소하였다. 또한, 정토나 천국, 극락 등, 일종의 구원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으로써, 죽음을 여느 ‘손실’에서부터 앞날에의 ‘희망’으로 승화시켰다.
이를 토대로 파생된 수많은 종교에서는, 그 이념의 바탕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자’ 라고 하는 철학적 사상이 담겨 있어, 그 방법론은 종교나 종파에 따라 다양함으로 보이고 있으나, 종교에 참여하는 주체가 인간인 이상, 사회와는 동떨어져 지낼 수는 없다는 관점이 있어, 개개인의 사람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계율과 같은 형태로 방법을 제시하거나, 또는 설화 등을 이용해서 납득시키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에 따라, 사원, 교회 등 종교시설의 관계자는, 일종의 상담인(카운슬러)로서의 사회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며, 근대의 생활 속에서 삶의 고비마다 작용하는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다. 또한 지역 주민의 불안이나 고민을 해소하고, 또한 지역사회의 일체감을 향상시키는 시설이기도 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러한 종교시설의 기능이 잘 작동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종교관의 쇠퇴 때문에, 또한 신흥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으로 말미암아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요구되지 않는 예도 있다.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 문제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자살을 하는 일도 있어 상황은 단순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 치료사들과 심리학자들은 심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 그 종류에 상관없이 종교를 가질 것을 권장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역시 심신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통계 역시 존재한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각박해지는 사회 속에서 일명 “군중 속의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현실의 삶 속 어려움으로부터 위안을 얻으려는 것은 물론이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생활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사람들 역시 “자아실현” 이라는 현실 너머의 또 다른 가치와 만족감을 위해 신앙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는 현대뿐만 아니라, 아수라장 같았던 18세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2. 수운 최제우와 동학의 탄생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유명한 ‘평안도 농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농민봉기와는 달리, 당시 정권을 비판하고 농민의 의식을 통일하는 데 일조했으며,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동학교도들이 있었다.
초대 교주 최제우
이와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경주 출신의 몰락한 양반의 자제였던 최제선은 조선 사회의 가부장적인 법률로 인하여 출세할 수가 없었고, 이는 그에게 크나큰 의구심을 품게 해주었다. 각지를 떠돌며 상업과 수련에 열중하던 그는 결국 양성이 불평등한 사회의 불합리성과, 기존의 어떠한 사상으로도 나라의 부패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세상을 구제할 새로운 방도를 찾기 위해 방랑하기 시작한다.
방랑하던 도중 최제우는 한 승려에게서 ‘을묘천서(乙卯天書)’ 라는 서적을 받게 되었으나, 그 서적의 내용은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에 영향을 받은 그는 구미산의 용담정에서 거처하면서 이름을 제선에서 제우로 고친 후 수운(水雲)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860년 음력 4월 5일, 그는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 또한 고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출생케 하여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라는 일종의 게시를 한울님에게서 받게 된다.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끝없는 커다란 도’라는 뜻의 ‘무극대도(無極大道)’ 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1년 후 이 ‘무극대도’ 는 모든 이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을 가진 ‘시천주(侍天主)’ 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1년 1월 이 ‘시천주’를 내세우며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 김대건 신부에 의해 유입된 천주교를, 사람들이 ‘서학(西學)’ 이라 부르기 시작하자, 자신의 사상을 이와 구분하기 위해 ‘동학(東學)’이라 이름 짓는다.
그러나 동학은 천주교와 함께 신분제를 무시하고 제사를 거부하는 등 유교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조정은 천주교와 함께 동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최제우 역시 이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서술하였으며, 조정에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 자신의 제자였던 최경상을 후계자로 지목하는데, 그가 바로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이다. 최시형이 날품팔이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대 교주였던 최제우와 동학이 신분차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기존에 배워온 모든 학문이 동학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철저하게 신앙심과 능력만으로 인재를 뽑는다는 점을 실감할 수가 있다.
2대 교주 최시형
최시형은 최제우의 깨달음에 대해서 지은 <동경대전> 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간행하여 동학사상을 체계화했으며, 그의 사상이었던 ‘시천주’를 발전시켜, “사람은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겨라.” 라는 뜻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조정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동학을 비정치적 종교활동에 국한시키려고 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894년, 동학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 ‘동학농민운동’ 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탄압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 운동(伸寃運動)으로 시작되었지만, 운동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되었고 또한 민란과 결합되어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기치로 내걸은 농민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역할이 농민의 요구를 횡적으로 연결시킨 조직적 매개체 또는 단순한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농민 운동의 지도 원리로서의 동학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며 동학 자체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의 구제를 철저히 하려는 정치적 운동의 성격을 아울러 지닌다고 보기도 한다.
결국 동학군은 끝내 조선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으며, 2대 교주인 최시형 역시 1898년 처형되고 만다.
3대 교주 손병희
최시형은 1897년, 의암(義菴) 손병희를 후계자로 정하여 그 뜻을 이어 나가도록 했는데, 일본의 개화문물을 받아들인 손병희는 이를 활용해 국권의 회복에 힘쓰기로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동학에는 친일세력이 등장하는 부작용이 일어났으며, 손병희는 1905년 친일 세력을 배제한 정통 동학파인 ‘천도교’를 창설하게 된다. 그는 최제우, 최시형의 ‘시천주’, ‘사인여천’을 계승하여 “사람이 곧 한울이다.” 라는 뜻의 ‘인내천(人乃天)’ 으로 발전시켰으며, 이외에도 “나라를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동학을 천하에 퍼뜨린다.” 라는 뜻의 ‘포덕천하(布德天下)’, “널리 사람들을 구제한다.” 라는 뜻의 ‘광제창생(廣濟蒼生)’ 등 현실 개혁적인 구호를 제창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는 현실을 목도한 그는, 동학교도들에게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1919년 3.1 운동에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등 사회 주체로서의 민중을 만들어내고 참여하게 하는 데 공헌했다. 조선왕조 500년과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을 지배해온 이념이었던 유교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자, 동학이 등장하며 이를 넘어선 것은, 노동하는 민중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동학 사상
i) 시천주, 사인여천, 인내천
먼저 수운이 창설한 ‘시천주’에 대하여 알아보자. 시천주란 ‘한울님을 내 몸에 모셨음’을 의미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이 된다. 최제우는 한울을 한자로 표기할 때 천주(天主)라고 표기했었기 때문에 천주교도로 오해를 받았지만, 동학의 한울님과, 천주교의 하느님은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동학의 핵심 개념인 시천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울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시천주’란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과 일체가 되기 위해 자기의 인격수련과 올바른 삶의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최제우의 ‘시천주’에서 한울님 관념은 고대농경사회의 ‘한울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천(天)은 토질 및 인력과 더불어 핵심적인 중요성을 띠는 요소로서, 천신·지신·조상신 숭배사상을 낳게 되고, 점차 보다 큰 부족국가사회로 발전됨에 따라 천신위주의 ‘한울사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울이라는 용어는 한알·한얼·한·하늘·하느님 등으로 변형되어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최제우의 ‘한울’은 이러한 전통적 천사상(天思想)을 새로운 맥락 속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님’에 대해서는 최제우가 천주의 주(主)를 언급하고 있는 <논학문 論學文>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주(主)는 그 높은 덕을 찬양하여 부모와 같이 섬기는 것이다(主者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천주라는 말은 하늘에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님’의 의미를 붙인 것으로 ‘한울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학의 한울님은 서학의 천주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천주교의 천주는 라틴어의 데우스(Deus)를 옮긴 것이나, 동학의 천주는 우리 겨레의 전통적인 한울님신앙을 한자말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학에서 천주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서학에서는 천주가 신(神)을 뜻하므로 여기에 존경의 의미로서 ‘님’을 다시 붙여 말하는 것이다. 최제우도 동학과 서학은 “도(道)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道則同也 理則非也).”라고 하였으나, ‘천주’라는 용어상에서 같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동학과 서학이 다름없다고 보고 탄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대 교주였던 해월은 시천주에 담긴 평등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겨라” 라는 뜻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이라 한다. 인간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면 당연히 그를 모시는 인간 역시 고귀한 존재라는 이유에서이다. 더 나아가 그는 여성이나 어린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 역시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 역시 존귀한 존재로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외에도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 한울이 깃들어 있으며 인간이 다른 인간이나, 동물, 사물을 대하는 방법이 곧 한울을 대하는 방법이라 주장하였다.
해월의 ‘사인여천’은 3대 교주인 의암에 의해 ‘인내천’으로 이어진다. 모든 이가 한울을 섬기고 있으며, 모든 사람을 한울을 대하듯 대해야 한다면,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남들을 한울처럼 대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한울임을 깨닫고 이에 가까워지는 것. 한울님다워지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인내천’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당시 조선의 신분 차별 의식과는 양립할 수 없었으며, 모든 이가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모시고 있기에 인간사회의 법도를 통해 차별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이로서 상민과 천민이 정치적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ii) 수심정기
수심정기(守心正氣) 는 수운이 내세운 동학의 수행 방법이다. 해석하자면,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로잡는” 것이다. 해월은 이를 “마음의 근원을 맑게 하고, 그 기운의 바다를 깨끗하게 한다.” 라고 말한다.
타 동양철학과 마찬가지로, 동학에서도 마음과 기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음이 평안하면 기운도 평안하고,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기운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몸을 이루는 기운을 바로잡으면서도, 기운으로부터 나오는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는 의외로 간단하다. 만물에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면, 일상의 모든 것, 심지어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는 것까지도 한울님을 접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모든 것을 경건히 해야 하며, 특히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할 경우, 식음만 경건히 해도 우주의 근원적인 존재를 모실 수 있음을 강조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의 용이성을 가진 수행을 동학은 중요시 여겼다.
iii) 개벽
동학의 사상을 이해하고, 수행을 거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이다. 즉, 개개인이 군자가 되는 것이다. 동학에서는 한울님을 모신 모든 이가 군자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필요가 없는 유교적인 사고와는 다른 방식이다. 모든 이가 군자가 된다는 것은, 모두 인격의 완성체가 되는 것이요, 모두가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은 이를 “다시 개벽”이라 고 명명했는데, 태초에 세상이 열린 것이 “개벽”이라면, 현재는 모든 이가 군자가 되지 못하는 시대요, 모든 이가 군자가 되는 시대가 마치 세상이 열리듯,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이를 토대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기존 신분질서를 유지한 채 최상위 지배층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신분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혁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닫는글 : 동학의 한계와 의의
동학은 신분을 막론하고 사회, 정치적인 주체로서의 개개인을 만들 수 있게 하였으며, 지금까지 단순히 세상에 대한 분노만을 표출하던 민중의 봉기가, 그 분노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의를 보여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그 주체가 될 수 있음 역시 강조했다. 그들의 말 그대로 ‘보국안민’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각성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동학의 기본적인 이념이었던 ‘시천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주의 근원을 모시는 인간이야말로 사회운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유교의 질서가 붕괴된 조선후기 사회에서 일반 백성들의 의식 속에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면, 동학은 그 갈망을 실체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학은 이와 동시에 하나의 종교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는 기복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해서 신앙 생활에 대한 보상심리가, 즉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보상과, 그리고 이에 대한 기대가 작용하는 경향도 농후하다. 참된 종교적 활동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게 하며,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지지받고 명예로운 삶, 혹은 배려와 희생을 통한 가치의 실현에서 비롯되는 희열을 얻음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행복감을 성취하게 해주는 것이다. 비록 자유와 행복이 그 동기였다 할지라도, 그 소명에 대한 사명감이나 진정한 수양의 계기가 발현되지 않는다면, 지속적으로 만족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동학과 동학농민운동이 단순히 상류층의 탄압과 이에 대한 보상을 목적으로 탄생했다면, 그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행복 역시 변질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반에 물건을 올려놓기 전에 선반의 먼지를 모두 떨어내야 하듯, 신앙생활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기 이전에 진정한 행복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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