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가터벨트 : 의외로 사람들이 모르는 칸트의 또다른 업적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순수이성비판>이나,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등 여러 업적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가터벨트를 고안해 낸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가터벨트는 남성전용 속옷이었는데, 신축성이 부족한 긴 양말을 허리끈에 연결해 고정하는 것이 가터벨트의 시초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양말의 신축성이 좋아지면서 가터벨트의 기능은 사라지는 듯 싶었으나, 여성의 나일론 스타킹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가터벨트는 나일론 스타킹을 고정하는 데 사용되는 여성용 속옷으로 바뀌었으며, 오늘날에는 여성의 색기를 발산하는 야한 속옷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칸트가 고안해 낸 남성전용 가터벨트의 흔적으로는 현대에 와서는 남성의 긴 정장용 양말을 고정하기 위해 종아리에 착용하는 벨트 형태의 가죽끈 "가터" 만이 남아있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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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마인드/418번 환자 - 참전군인의 PTSD를 통해 보는 전쟁론의 재해석

2022.06.23
전편에서 다룬 네버마인드를 이어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루게 될 환자는 첫 스테이지에서 조우한 251번 환자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경우 조우할 수 있는 418번 환자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게임에 대한 소개와 정보는 전편 글을 참조하시길 바라며, 바로 리뷰를 시작해보도록 하죠.
전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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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번 환자
일련의 사건 후 연구소에 수용된 노숙자입니다.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며, 공격성을 보입니다.
트라우마와의 연관성이 의심되는 환자입니다. 정신 조사 전의 기존 인터뷰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검사 이전 환자의 진술
언젠가 나와 함께 지옥에 갈 겁니다!
난 괴물이에요.
아니... 아니야. 괴물은 그 사람들이에요.
다들 날 재수없게 여겨요. 하지만 정말 재수 없는 건 그 인간들이죠. 그 사람들이 늘어놓는, 전화가 끊어졌다거나 천의 실이 몇가닥인지 센다든가 하는 것들요.
세고... 세고... 세고...
실수를 세고... 실수를 세고... 실수에는 피가 묻어 있어요.
내 실수... 내 피가 아니야... 내 피가 아니야... 왜 내 피가 아니죠?
난 세상을 구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망할 놈의 세상을 구해야 하는 거죠?

이번 스테이지의 시작은 극히 평범한 거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하지만 부유한 도시의 모습이라기보단 마치 슬럼가를 연상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페이즈에서는 점프스케어나 공포심을 부각시킬 만한 요소가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쓰레기통 속에서 깡통을 발견해 주울 수 있는 상호작용 요소만이 존재합니다.

캔 재활용 부스입니다.
한국에서는 흔한 기기는 아니지만, 미국 등의 번화한 해외 거리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기기로, 캔 재활용을 위해 깡통을 따로 모을 수 있는 일종의 분리수거함이며, 캔을 넣을 때마다 동전 하나를 줌으로서, 재활용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동전 획득

동전을 분수대에 던질 수 있습니다.
미래를 불 속에 던져라, 그리고 새롭게 돌아오라
이는 MMA 선수 마이클 챈들러의 명언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최악의 경우 패배의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을 불 속에 던져라.
승리의 전율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Throw yourself into the fire so at worst you can feel the agony of defeat,
but at best you will feel the thrill of victory while daring greatly.

동전을 분수대에 던지자 거리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니,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 듯한 이미지들이 주마등처럼 출력됩니다.
이번 의뢰인의 트라우마는 전쟁터와 연관된 것이며, 거리에 떨어진 것은 아무래도 포탄이었던 것 같군요.

그리고 환자의 트라우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듯, 초토화된 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건물과 거리 곳곳에 보이는 기괴한 마네킹과 그 팔은 덤

불에 그슬린 마네킹들이 보입니다. 마네킹에 접근하면 플레이어에게 데미지를 주면서 잡음과 함께 플레이어(혹은 의뢰인으로 찾아온 환자)를 비난하는 듯한 말투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필드에서 하나둘씩 사건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거리의 네온간판에서 출력되는 비난의 메시지

표지판의 빈 공간을 화살표 모양으로 만들면 열리는 문 형태의 퍼즐

문을 열자 귀신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귀신들은 딱히 플레이어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으나 게임이 끝날 때까지 내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계속 필드에서 보이는 불에 그슬린 마네킹들


죽어라, 꿈꾸어라, 반복하라.
영어권에서 자주 등장하는 명언 중 하나인 Dream, Believe, Do, Repeat를 비틀어 놓은 듯한 문구로 추정됩니다.


3, 6, 5라는 비밀번호를 의미하는 오브젝트
3마리의 쥐 시체, 6개의 술병, 그리고 5개의 주사기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이번엔 약상자를 든 마네킹들이 보입니다.

약에 접근하자 마치 마약을 복용한 듯한 카메라 흔들림 연출을 보여줍니다.



마약으로 인해 배경의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플레이어(혹은 의뢰인)을 비난하는 간판 속의 메시지.
그리고 필드에서 보이는 더 많은 단서들.

다른 단서를 찾아 필드 안의 건물로 진입하자, 마약의 후유증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뒤틀린 복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을 열려고 하지만 참호를 만들 때 쓰는 사대 더미에 가로막혀 더 이상 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보여주더니,

끝없는 계단과 함께 등장하는 수많은 귀신들.
귀신들은 여전히 플레이어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사대가 문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건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다다르지만, 웬 퍼즐 하나가 가로막고 있군요.
버튼을 누르면, 누른 버튼의 상하좌우에 위치한 다른 버튼의 불이 켜지거나 꺼지는 방식의 퍼즐로, 모든 버튼의 불을 켜거나 꺼야 합니다.

모두 켜서 완료.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또 다른 단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며 방금 전의 계단과 귀신들의 모습이 다시 나타납니다.

떨어지자 도착한 곳은 바로 방금 전의 마약 상자를 들고 있던 마네킹들이 있던 곳.
이곳에서 나가 다른 단서를 찾아봅시다.

다시 평범한 시내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거리에는 여전히 불에 그슬린 마네킹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시 쓰레기통을 뒤져 보니 이번에는 구급 상자가 보이는군요.
상자 안에는 대검이 들어 있었습니다.

대검을 들고 바닥에 누워 있는 상처투성이 마네킹의 손을 찌르자, 마네킹이 입에서 웬 토큰을 토해냅니다.

그리고 처음 시작할 때는 보이지 않던 놀이동산의 입구


토큰을 입장료로 지불해 놀이동산에 들어갑니다. 여전히 입구 복도는 마약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듯, 뒤틀려 있군요.

필드에서 계속 볼 수 있는 마네킹이 배치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범한 놀이동산의 모습



그리고 놀이동산에 있는 오늘의 운세를 연상케 하는 게임기에서 출력되는 메시지.
여전히 플레이어에게 맹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롤러코스터에 접근하자, 탑승자들의 비명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화면에 핏자국이 맺힙니다.
마치 전장의 아수라장과 민간인들의 아비규환을 묘사하듯이 말이죠.

놀이동산 역시 기괴한 모습과 귀신이 가득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다급한 무전 소리와 총성이 계속해서 플레이어의 귓가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전쟁터에서 겪은 트라우마가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인해 재발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전쟁터에서 표적을 놓치면, 순식간에 자기 자신이 표적이 되어버리는 것이 바로 군인의 숙명.



그리고 전쟁터에서 생기는 트라우마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메시지를 모두 출력한 점쟁이 게임기가 폭발하면서, 다시 한번 놀이동산의 모습이 바뀝니다.

전쟁터에서의 실패의 대가는 곧 죽음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시뻘건 해골의 컷신이 출력됩니다.

마지막으로 전쟁터의 참상이 그대로 투영된 듯한 피범벅된 놀이동산이 보이는군요.
회전목마에도 목마 대신 마네킹이 봉에 꿰뚫린 채로 매달려 있습니다.

겁먹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면 마지막 단서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자기 자신과 아군이 곧 선이요, 적들은 악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전쟁터에 뛰어들지만
사실 전쟁터에서 조우하는 적들도 결국에는 평범한 인간이고, 병사임을 깨달을 때 이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이것이 전쟁터에 대한 트라우마를 만드는 원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참전군인들의 인터뷰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이기도 하죠.

모든 단서를 모으자 플레이어를 구출하러 오는 듯한 헬기 소리와 함께, 스테이지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필드가 사대 방벽으로 봉인되어 더 이상 필드를 둘러볼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전편과 마찬가지로 모아 놓은 열 개의 단서 중 다섯 개의 진실을 찾아서 올바른 순서대로 배열해 봅시다.
역시 다섯 개는 진실, 나머지 다섯 개는 거짓.
- 부모님은 한 번도 날 이해해준 적이 없습니다. (FALSE)
- 누구를 구하고 누구를 파괴해야할지, 그걸 잊어버렸다. 좋았던 기억도, 안전하다고 느낀 기억도 없다. (TRUE)
- 난 어딘가 이상했다.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FALSE)
- 하지만 뭔가를 구하려면 다른 뭔가를 부숴야 할 때도 있다. (TRUE)
- 난 늘 자기혐오와 불신에 시달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그것들에 목소리를, 힘을 주었다. (TRUE)
- 난 가끔 재미로 벌레를 해부했다. (FALSE)
- 그것들은 그저 한 번으로 그치는 노래를 부른 게 아니다. 수백 개의 속삭임이 만드는 흥얼거림, 그런 거였다.
난 늘 그 것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내가 절대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다. (TRUE)
- 그것들은 증오로 가득한, 성난 사람들이었다. (FALSE)
- 난 십 대 때부터 그것들을 썼다. (FALSE)
- 나는 용사였다.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TRUE)

그리고 또다시 밝혀지는 진실.
참전군인이었던 의뢰인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여가면서 점차 인간성이 무너져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혼령이 보이는 환각과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환청이 계속되었고 이를 잊고자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어느날 어떤 놀이동산에 입장했다가 롤러코스터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소리에 전장에서 울려퍼지던 비명소리를 연상해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체포되어 연구소에 수용된 거였죠.
그리고 의뢰인을 괴롭히는 트라우마를 치료하고자, 뉴로스탤지아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번 스테이지에서 다루어진 소재는 PTSD의 일종인 전투전 증후군입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겪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장병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쟁 상황과 똑같이 느끼고 행동하는 정신질환의 일종이죠.
오늘날의 전쟁터에서는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연속적으로 전투를 강요받는 경우가 다반사가 됩니다.
죽거나 다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물론이요, 총성과 폭발로 만들어지는 굉음, 그리고 전우의 사망 등 불안과 공포, 그리고 좌절을 느낄 수 있는 요소는 차고 넘칩니다.
그리고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과 함께 발생하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투는 병사의 심신 모두를 피폐해지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죠.
이를 군사학적 용어로 전투전 증후군이라고 하며, 정신적으로 건망증이나 집중력 저하, 심지어는 기행 등의 증상을 보이는 것이 주된 특징입니다.
심리적으로는 불안감, 불면증, 악몽, 죄책감, 신경질 등을 유발하기도 하며, 이것이 몸의 병으로 이어지는 경우 역시 다반사입니다.
또한, PTSD를 겪고 있다고 해서 사람 자체가 바로 폐인이 되거나 24시간 내내 공포에 떨면서 지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를 가시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이를 판단해 치료하는 것 또한 몹시 어려운 과제입니다.
지금도 어딘가의 군영에서는 병사들이 이에 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밤에는 안정제를 복용하거나,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국에서도 월남전 참전군인들이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악몽 때문에 신경정신과나 종교 시설을 방문하는 경우를 자주 찾아볼 수 있으며, 자살이나 자살미수로 이어지는 일도 흔히 보이는 사례임을 알 수 있듯이 말이죠.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을 생각해보면, 남한인들에게 있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조국수호를 위한 전쟁이요, 월남전 역시 반공이라는 강력한 명분이 있었지만, 그 애국심이나 애향심도 PTSD 자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전쟁으로 인한 PTSD는 심리학 역사상 처음으로 '남성에게도 정신질환의 발생여지가 있다.'라는 사실을 증명해준 사례이며, 정신질환의 대상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간 전체로 확장되어 연구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서양철학사에서 거론된 전쟁론에 대해서도 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간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군사적 수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으므로, 군주는 전쟁의 준비와 실행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현실의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을 자신의 이론 속에 포섭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홉스는 전쟁을 미화하거나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국가의 등장을 통해 인간 사회의 안정과 역사적 발전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틀에서는 현실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 을 통해 전쟁을 제도적 차원에서 방지함으로서 세계 평화와 질서 유지를 꾀할 것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세계시민권이라는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할 것과, 국가의 헌법이 공화주의에 입각해야 할 것임을 내세웠죠.
이는 오늘날의 인권, 민주주의 개념과 유사하며, 평화라는 인류 궁극적인 문제를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 사례로 꼽힙니다.
그리고 1920년 탄생한 국제 연맹의 이념을 통해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계승됩니다.

칸트에 이어 헤겔은 전쟁 상황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 금지나 초토화 작전 금지 등의 국제법 존중을 강조했으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에서 발생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사건처럼 기존의 국제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발생하는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나 최근의 러우 전쟁에서 발생한 전쟁범죄 등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헤겔의 이상적인 이론이 오늘날의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전쟁이 발생하면 인간과 사회 뿐만 아니라, 전쟁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것.
즉, 전쟁터와 그곳의 모든 것이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습니다.
환경의 파괴와 오염은 기본이요, 자원과 물자의 낭비,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는 생태계와 인간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구성원이므로 이런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인간의 정신 세계 역시 그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들은 전쟁 현상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거부한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국가 운영과 정치 활동 등에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할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는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며, 이에 대한 대책을 다방면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전쟁보다 평화가 더 좋다는 이상적인 탁상공론 대신, 역사 속에서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전쟁이라는 재앙이 또 벌어졌을 때, 이를 수습할 대책이 여러모로 필요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지기 바라며, 플라톤의 전쟁 명언과 함께 이번 글을 마무리합니다.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볼 수 있다." - 플라톤
참고문헌 : 충남대 철학과 서영식 교수 논문
「서양 근대의 전쟁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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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서적 발제문

1. 여는글 - 세 번째로 등록된 한국인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2019년 11월, 유네스코는 2021년의 세계기념인물로 김대건 신부를 지정했다. 2012년 탄생 200주년을 맞은 다산 정약용과, 2013년 동의보감 발행 400주년을 맞은 구암 허준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다.
2021년은 1821년 탄생한 김대건 신부의 2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김대건 신부는 당시의 국가였던 조선 계급 사회 내에서 기득권의 삶을 포기하고 평등과 존엄, 생명, 진리 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인물이자, 1784년 천주교가 한국에 전해진 이후 61년만에 탄생한 최초의 한국인 사제요, 10개국 이상에 주보성인 성당까지 존재하는 성인임이 그 이유라고 유네스코는 밝혔다.
유네스코 기념 해는 2년마다 지정되며, 기념 인물 후보자는 1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보편적 지명도와, 50주년/100주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을 기념할 수 있어야 한다. 김대건 신부는 당시 국가였던 조선에 천주교와 그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과 대만, 심지어 필리핀까지 오가며 신학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조선 사람들에게 열성적으로 천주교를 알리다 순교하였으며,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기념했기 때문에 이 조건에 모두 부합한다. 본 글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발행한 서적을 토대로 그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것이 갖는 역사적, 철학적 가치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충남 당진에 위치한 솔뫼성지의 김대건 신부 생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여 헌화와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
(08.15.2014)
2. 김대건 신부의 생애
1784년 최초의 세례를 받은 이승훈을 시작으로 조선에 천주교가 유입되고, 10년 후 조선으로 밀입국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활동으로 천주교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1800년대에 이르러 조선의 천주교도는 어느새 만 명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나 천주교 탄압에 소극적이었던 정조가 죽자,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300여명의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기반이 무너졌으며 생존한 교인들의 대다수가 신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 중에는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그리고 종조부 김종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대건은 1821년 충남 당진의 솔뫼마을에서 김제준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827년 정해박해 이전에 가족과 고향을 떠나 용인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의 피에르 모방 신부(1803~1839)가 지방 교우촌 순방을 목적으로 용인의 은이 성지를 방문할 때즈음 김제준 가족도 그곳으로 가서 성사를 받았고, 이 때 모방 신부는 어린 김대건을 보고 신학생으로 선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가 1836년 7월 11일이었다.
당시 모방 신부는 이미 같은 해 2월 6일에 최양업(1821~1861), 그리고 3월 14일에 최방제(불명~1837)를 신학생으로 선발한 상태였으며, 거처였던 정하상(정약종의 차남, 정약용의 조카/1795~1839)의 자택에서 이 두 소년에게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김대건 역시 모방 신부를 따라 이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이 셋이 배우던 언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신학 수업에 가장 중요한 라틴어였을 것이라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추측하고 있다.
1836년 12월 2일, 조선 신학생 셋은 모방 신부와 십자가 앞에서 조선교구 신부가 되어 봉사할 것임을 서약하고 서울을 떠나 약 7개월 후인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한다. 그리고 임시로 설립된 조선 신학교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들에게 불어, 라틴어, 신학, 서양철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최방제가 위열병으로 사망했고, 그들은 1839년 4월의 마카오 소요 사태를 피해 필리핀의 롤롬보이 (마닐라 인근의 도시)로 피신하여 계속 교육을 받았다.
이후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2년까지 여러 선교사들의 교육을 받아오면서, 2월 15일 중국의 외교 사절을 목적으로 파견된 프랑스 군 장교 세실 함장의 군함인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된다. 조선 원정을 원했던 세실 함장과 이를 통해 조선 교회와의 연락을 재개할 계획을 세운 리브와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가 이들을 통역을 위해 동행할 수 있게 해 준 덕분이었다.
마카오를 떠난 이들은 마닐라, 대만, 만주 등을 오가며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1843년 4월, 만주에 자리 잡은 작은 교우촌인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소팔가자에서 김대건은 그곳의 주교인 페레올을 만나고 그의 지시를 따라 1844년 2월 5일 입국로 탐색을 위해 거처에서 2천리나 떨어진 두만강 하구의 도시인 훈춘으로의 여정을 감행한다. 2개월 후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동년 12월에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게 된다. 부제품을 받게 된 정확한 날짜는 기록에 없으나, 1844년 12월 10일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안드레아(김대건)과 토마스(최양업)은 이미 부제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12월 10일, 혹은 그 이전에 부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를 먼저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고 입국을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김대건 부제는 1월 15일 의주와 평양을 거쳐 한양에 도착한다. 조선을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귀국한 김대건 부제는 해로를 통한 입국을 위해 배를 구매하고, 지도인 조선전도를 제작하였으며 서울 석정동에 선교사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한 후 열한 명의 신자들과 함께 제물포에서 상해를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닷새 간의 험난한 항해를 거쳐, 김대건 부제 일행은 중국 배를 만나 보호를 받으며 상해 앞바다인 오송에 도착했고, 오송에 주둔한 영국군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1845년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마카오에 있던 페레올 주교는 상해에 도착했다는 김대건 부제 일행의 연락을 받아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로 달려갔고, 이들은 상봉에 성공한다.
동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의 업적을 치하하여 상해 부근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서품식을 거행하였고, 이로서 김대건은 한국 역사상 첫 번째 신부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24일 상해의 횡당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열었으며, 31일에는 함께 여정을 떠났던 열한 멍의 신자, 페레올 주교, 그리고 다블뤼 신부와 함께 조선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 일행의 항해는 순조롭지 못했고, 그들의 배 라파엘호가 여러 번 침몰의 위기를 겪다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 표착한다.
이후 라파엘호는 제주도를 떠나 전라도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면서 일행은 강경 부근에 위치한 교우촌인 나바위에 도착하게 된다. 이 때가 1845년 10월 12일이었으며,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조선어를 배웠으며, 김대건 신부는 그 인근, 특히 용인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만난 모친과 부활절을 보낸 후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는 해로를 통해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한 통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들어 만주에 머물고 있는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다. 의주 장면의 국경 감시가 삼엄해지자, 결국 두만강 근처의 경원을 통해 시장이 열리는 때를 틈타 둘을 입국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선 국경에 있는 마을에 머물며 입국할 때를 기다리다 중국 관리에게 발각되어 오랫동안 심문을 받고 요동으로 쫓겨나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첫 계획이 실패하고, 김대건 신부는 1846년 5월 일곱 뱃사공과 함께 백령도에서 어업을 하고 있던 중국 어선들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일행의 동선 중 하나였던 순위도의 등산첨사인 관장이 중국 배들을 쫓아내기 위해 김대건 신부 일행의 배를 빌리고자 했고, 신부는 공사로 양반의 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조선의 법을 내세워 배를 빌려주지 않았다.
관장은 이를 의심해 포졸들로 하여금 뱃사공을 잡아 온갖 신문을 거듭한 끝에 김대건 신부가 천주교도임을 알아차리고 1846년 6월 5일 밤 김대건 신부는 체포되고 만다.
체포된 김대건 신부는 6월 13일부터 7월 19일까지 여섯 차례나 혹독한 문초를 받았으나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똑같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관련자를 대거나 신부로서의 소명을 회피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순교의 각오를 다지며 세 통의 서한을 쓰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렸다. 하나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최양업 부제에게, 또 하나는 페레올 주교에게, 마지막 하나는 조선의 모든 천주교 신자들에게 남기는 서한이었다.
그리고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26년이란 짧은 생은 열두 망나니의 칼질로 막을 내리게 된다.
관리들은 김대선 신부의 시신을 새남터에 묻고 신자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감시인까지 붙여 놓았으나, 이후 젊은 교우들이 심야를 틈타 시신을 수습하여 안성 미리내에 이장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1991년, 미리내 성지에 김대건 신부와 이에 연관된 인물들의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 성당>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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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의 김대건 신부상
3. 김대건 신부의 업적
1837년부터 1842년까지 마카오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학문을 익힌 김대건 신부는 불어, 라틴어, 중국어까지 활용하여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총 서른한 통의 서한과, 사제와 수도자를 주제로 하여 신앙의 교훈을 설명하는 라틴어 작문 시험 답안지,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며 페레올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보고서였던 <훈춘 기행문>, 그 과정에서 그린 지도 <조선전도>, 그리고 서한들 중 열여섯번째 서한에 동봉된 <조선 순교사 보고서>이다.
이외에도 옥중에서 영국산 세계 지도를 번역하였고, 채색한 두 장의 세계 지도와 이에 기반한 <지리 개설서>를 편찬했다고 알려지나, 오늘날 전해지지 못했다.
또한 선교 활동과 프랑스 선교사 입국로 개척 역시 그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데, 1845년 사제품을 받고 1846년 순교하기까지 약 13개월간이라는 짧은 사목 생활이었으나, 진지하게 성서를 집전하고 교리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데 정성을 다하여 많은 인망을 얻었다. 체포된 이후에도 옥중에서 함께 갇혀있던 교우들에게는 고해성사를 통한 격려를, 예비 신자들에게는 세례를, 그리고 자신을 체포한 관장과 포졸들, 그리고 조정 대신들과 감사들에게도 적극적인 선교를 일삼았다.
본 발제문의 참고자료였던 기념서적의 저자 김정수 신부(1947~현재)는 김대건 신부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위대함이 바로 이 시기와 상황에 개의치 않고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했던 시도에서 나온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김대건 신부의 이 짧지만 강렬한 생애는 종교와 정치, 삶과 신앙, 국내와 국외의 여러 영역을 거치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삶의 지표를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희년이다. 일곱 해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번 지나야 오는 50년마다 돌아오는 해요, 성경은 이 해를 거룩하게 지내라 명시한다. 하느님이 주시는 해방과 평등을 가시화하는 해로 지내자는 것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21년 김대건 희년 주제를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라고 정했다. 김대건 신부의 서른한 통의 서핸 중 스무 번째 서한에 담긴 문구이자, 관아에 체포된 김대건 신부에게 한 관장의 질문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이에 망설임 없이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했으며, 175년이 지난 지금 이 물음은 다시 천주교인들에게 돌아온다. 성인이 지녔던 확고한 신앙을 되새겨 천주교인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되묻고 있는 셈이다.
4. 닫는글 - 175년만에 돌아온 물음
김대건 신부의 만 25년의 삶을 냉정하게 살피면, 당시 조선 정부에 반하는 운동을 일삼으며 각국, 각지를 오가던 젊은이가 잡혀서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죽은 것일 수도 있다. 이에 한 술 더 떠서 조정에서는 이런 불순분자를 처형했으니 조선의 체제를 수호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모든 성인들의 특성은 그들의 주인이 부르시면 즉시 자신이 몸담은 곳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고향일 수도 있고, 고국일 수도 있으며, 현재 살아가고 있는 지상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모든 진리를 향한 호기심에 대한 해답은 항상 대가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요, 진리를 위해 떠난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걸고 떠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는 단순히 신학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학문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묵묵히 임했던 김대건 신부는 단순히 종교에 대한 열정을 지녔던 신부로서만 보아야 할 인물이 아니다. 그의 업적과 생애에 담긴 정신과 마음을 이해하고, 이를 현 시대와 연결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작성자 금강야차. 07.18. 2021
참고자료 : <성 김대건 바로 알기> - 김정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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